故 나운몽 목사 학술세미나 요약·해설 제4편 …
서영석 교수 “1950·60년대 성령역사는 겨레에 한국의 소망 일으켜”
본 논문은 1950년대 이후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용문산기도원과 나운몽의 활동을 살펴보면서 용문산기도원의 특징과 그 역사적 평가작업을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용문산운동이 이단 시비에 휩싸인 이유는 용문산 집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자 기성교회가 위협을 느꼈으며, 그의 열정적인 설교와 활동, 교회비판적인 성향이 기성교회와의 마찰을 빚었다. 더욱이 그가 감리교 장로이면서 장로교 지역인 대구 경북에서 활동한 것은 그의 이단성 시비를 촉진시켰다. 이 때문에 용문산운동의 초기 이단시비는 교리적 판단보다 질시와 교권적 억압이 이유였다. 후기에는 여기에 더해 교리적 문제까지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단 판정에 있어서 교계의 규정이 명확한 논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는 나운몽과 용문산운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신학적 판단의 부족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도들은 기성 교단의 강력히 얘기하는 얘기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용문산운동은 이단시비에 휩싸이면서 성도들의 발걸음이 멈춰졌고 1970년대부터 약화되었다. 결국 용문산운동은 기성교단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던 신앙운동이었으며, 오히려 기성교단들은 성도들에게 용문산기도원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시키면서 차츰 용문산의 열기가 식어갔다. 또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급성장하면서 개교회별로 기도원·수양관을 설립하고 교단별 부흥사들도 많아지면서 교인들 관심이 용문산에서 나눠진 점, 1978년 교파 없는 기도원 철거 대통령령이 계기가 돼 오성 교단을 창립한 점도 약화요인이 됐다.
용문산기도원운동의 특징은 ‘성령운동’과 ‘민족주의 선민사상’이다. 나운몽에 있어 핵심은 전도에 대한 사명이었으며, 전도는 용문산의 주된 운동이 되었다. 이를 위해 나운몽은 옥중에서 확신하게 된 3겹줄 전도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에 전도의 붐을 일으켰다. 특히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람들과 교역자까지 도시로 모여드는 상황에서 시골에 교회가 없음을 아쉬워하며 ‘교회없는 동리에 교회 세우기’ 운동인 일동일교회운동을 시작해 500여 교회를 설립하는 등 한국교회 부흥의 일익을 담당했다. 이같은 용문산운동의 기저에는 그가 체험한 성령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용문산운동은 전부 성령의 역사였다. 그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받아 영적 영향력을 갖게 되므로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와 용서의 기쁨을 누리고 성령체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나운몽은 용문산운동의 카리스마적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고 강력하게 성령운동이 전개되었다. 나운몽의 성령운동은 한국교회 영적 각성에 크게 기여하였고, 성령운동의 확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과거 한국교회사 가운데 한국교회 성장의 동력은 성령운동이었고, 특히 1960~70년대 한국교회의 신앙성향은 성령운동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 더욱이 당시 성령운동은 가난과 질병, 긴장과 불안 가운데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용문산집회를 통해서 영적 각성과 신비적 체험을 가져다 주었고 성령집회는 이러한 교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결국 성령운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간절했던 영적 욕구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두번째 특징은 ‘민족주의의 선민의식’으로서 나운몽은 민족주의 정체성을 입증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특징이었다. 이는 어려서의 유교적 교육, 일본 유학, 남북 분단, 사회혼란의 경험과 시대속에서 나온 영감의 일환이었다. 그에게 있어 민족적 소명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었고, 한국복음화운동, 북진운동, 구국기도운동 들을 전개한 원인이었다.
‘나운몽 용문산운동의 역사적 평가’를 정리하면, 당시에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는 민족적 시련에 지쳐있는 겨례에게 한국의 소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촉발된 용문산기도원의 성령운동은 신앙의 확신, 천국의 소망, 영적 체험을 하게 하는 등 한국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운몽의 성령운동은 신앙체험을 강조하므로 개인주의적 신앙 경험을 바탕한 신비주의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영적 부분에 치중하고, 신앙의 내면화에 치중하므로 상대적으로 개인구원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평가로서 한국의 기도원운동을 촉발시켰다. 용문산기도원을 중심한 성령운동이 초대교회적 열심과 기도를 통한 성령체험 강조로 교인들에게 신앙의 확증과 신앙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었다. 이들의 뜨거운 기도와 전도열은 한국교회를 부흥시키는 견인차의 동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당시 성령운동은 용문산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매년 8월에 열리는 집회 때는 서울에서 김천역까지 특별 수송 열차가 배치될 정도로 그 부흥 운동이 대단했다. 용문산 기도원 운동의 열기가 한국교회 부흥과 초교파 운동에 일획을 감당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전국의 교역자들을 불러 모아 초교파적으로 부흥회를 개최하여 많은 교역자들에게 성령의 불을 받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기성(제도) 교회와 용문산운동의 관계이다. 1950~60년대 나운몽의 기도원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이유는 기성교회가 채워주지 못하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교회 안에 성령부재 현상이나 기성교회의 제도적인 부조리가 나타났다. 또한 극단적이며 폐쇄성향을 가진 기성교회의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과 신앙지도의 반작용으로 기도원운동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기성교회가 교인들의 감정, 심리,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면서 용문산운동과 기도원을 중심한 성령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운몽은 평신도 지도자였기 때문에 당시 사회상과 교회의 잘못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물질주의, 세속주의, 교권주의를 단호히 배격하고 회개하고 진리의 길로 돌아오라고 역설했다.
결론적으로 195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성장하는데 그 원동력은 성령운동이었고, 그 성령운동의 배후에는 기도원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도원운동의 중심에 용문산기도원이 있었다. 또 용문산운동의 집회의 특징은 민족주의 선민사상에 호소하여 한국의 소망과 민족적 사명을 강조하여 집회 참석자는 물론 한국 교인들이 구국적 사명을 각성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용문산운동은 신비적 체험, 자기중심적 체험에 빠지게 하는 한계가 있었지만, 민족주의적 선민주의를 통해 한국의 소망을 말했고, 교역자에게도 회개와 변화를 촉구했다. 즉, 나운몽은 기성 교회의 한계를 보았고 그것은 성령운동으로 극복하고 대안을 제공하는 기도운동체로 용문산운동을 이끌어 나간 계기가 됐다. 따라서 나운몽이 단지 성령운동을 통한 기도와 회개, 변화 등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신앙운동에서 벗어나 애향숙의 목적에서 밝힌 것처럼 ‘사랑나라 건설’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갖고 있었다. 결국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운동은 계몽적이고, 초교파적이고, 구국적인 성향이 있으며 평신도에 의해 일어난 성령운동이며 강력한 변화의 불길이었다. 또한 나운몽은 해방과 전쟁의 와중에서 나름대로 민족주의적인 견지를 가지고 토착화를 시도하였던 인물이다. 그의 타종교 이해나 사상 전개 가운데 나타나는 이단 시비 문제는 그가 정규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문제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단의 기준은 성서의 말씀에 근거한 구원의 진리나 주요한 신앙 교리 외에는 어느정도 여유로운 기준을 가져야 한다. 특히 전도의 방법, 한국 전통종교를 수용하는 방법에 따른 토착회에 대한 해석의 차이나 이견 등은 이단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논의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운몽과 용문산운동이 종파주의적 모습으로 평가되었지만 여러 이단 종파운동에서 보여주는 비도덕적이고 사이비적 양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용문산기도원운동의 근본 신학과 교리가 무엇인지, 한국교회와 한국 기도원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바르고 정당한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