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생과 회복 허락하지 않는 사회 우리 모두를 파괴 …
예수님의 해법, 사회에 독선과 위선 벗을 성찰과 개인에게 책임 가르치셔 (요 8:7~11, 벧전 4:8)
인간과 사회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유는 ‘그가’, ‘사회가’ 잘 할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기대, 격려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을 거둔 사회, 기대를 더이상 하지 않는 인간과 사회에 미래는 없다. 가능성을 내포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 속성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기반으로 구성, 유지되고 발전하는 데 공동체의 존재 이유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낙인 찍기에 바쁘다.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사라진, 꽉 막히고 경직된 채 회복탄력성을 잃은 사회가 되었음을 뜻한다.
최근 배우 조진웅이 고교 시절 소년범 전력이 보도되자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은퇴를 선언하면서 새로운 논란으로 비화되고 있다. ‘갱생’과 ‘책임’ 사이의 논란이다. 박찬운 한양대 로스쿨 교수는 지난 8일 소셜미디어에 ‘비행 청소년의 희망을 꺾는 비정한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지난 주말 배우 조진웅이 청소년기 범죄 전력 논란 끝에 은퇴를 선언했다”라며, “나는 이 소식을 접하며 깊은 분노를 느낀다. 분노의 대상은 배우가 아니다. 그를 끝내 무대에서 끌어내린 이 사회의 비정함이다”라고 했다.
그는 “방황하던 소년이 수십 년의 노력 끝에 대배우로 성장했고, 대중성과 작품성 모두를 인정받으며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울만한 인생 성공 스토리다”라고 전제하고 “더 나아가 그는 ‘갱생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인물로, 비행 청소년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라고 했다. 그러나 “소년 시절의 상처를 다시 파헤쳐 도덕의 이름으로 재판정에 세웠고, 그가 쌓아 올린 모든 성취를 단숨에 무효로 만들었다”며 “끝내 스스로 무대를 내려가게 했다. 이것이 정의인가. 이것은 집단적 린치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조진웅의 배우 은퇴가 청소년에 대한 잘못된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우려했다.
박 교수는 “우리는 청소년에게 ‘실수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반성하면 기회는 있다’고 하지만 누군가가 그 말을 현실로 증명해 보이자 사회는 돌연 태도를 바꿔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소년 보호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졌다고 안타까워하며 ‘갱생’의 소년보호처분 제도의 취지를 강조했다.
박 교수는 “소년 보호제도는 껍데기만 남고, 사회는 사실상 평생형 낙인 체제를 운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라며, “절망은 다시 방황을 부르고, 배제는 또 다른 비행을 낳는다. 진정 사회 안전을 고민한다면 우리는 성공한 갱생의 사례를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한쪽에선 “공인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금, 과거의 폭력 전과가 사회에 미치는 파장을 외면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또한 “피해자는 그 30년 동안 어떻게 살았나”라고, 피해자의 입장을 간과하거나 그 아픔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공적 책임도 무겁다. 그는 동네에서 조용히 일하며 사는 무명의 시민이 아니라, 정의로운 ‘형사·독립운동가·국민 특사’ 역할을 맡아온 국민 배우였다. 광복절 경축식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낭독한 사람이다. 공적 ‘책임’을 강조하는 이들은 이미지와 신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해온 사람에게, 과거의 무게는 일반인과 달리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갱생’을 주장하는 쪽도, ‘책임’을 주장하는 쪽도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조진웅 배우의 은퇴 사건의 본질은 누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가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한 인간의 잘못을 어떻게 대하고 다루는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다. 역동적 사회는 비판과 정죄에서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 정죄(定罪)의 과정이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죄는 분명히 하되 기회가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죄만으로는 아포리아(출구가 없는 난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조진웅 배우는 이미 30년도 더 전에 죄값을 치렀다. 소년법 제32조 6항은 “보호처분을 받은 소년은 장래 신상에 어떠한 영향도 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한다. 더 나아가 소년법 제70조는 보호사건 기록을 철저히 비공개로 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소년에게 갱생의 기회를 부여하고 낙인을 방지하기 위한 합의된 장치다.
그렇다면 이젠 정죄가 아니라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공인으로서 공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기회도 같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낙인찍기에 혈안돼 있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낙인이란, 한 개인의 정체성 전체를 하나의 단점으로 환원하는 폭력이다”라고 한 것처럼, 낙인은 사회의 가장 큰 범죄 행위이다. 사회는 본질적으로 “사람은 변한다”라는 믿음 위에서만 존속할 수 있는 공동체다.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육의 ‘교敎’ 자는 아들에게 회초리를 쳐서 잘못을 바로잡는, 변화를 전제한 사랑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없이, 사랑 없이 교육이나 공동체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사랑 없는 정죄와 성찰 없는 정의감은 마녀사냥이나 인민재판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사회범죄를 만들고 결국은 그 사회 전체를 미래가 없는 수렁으로 떨어뜨리고야 만다.
지금 우리 사회는 판결문도 없이, 항소도 없이, 집행유예도 없이 언론과 여론이 결합해 즉각적인 형벌이 집행되는 집단적 무책임성이라는 구조적 부정의에 빠졌다. 에밀 뒤르켐은 도덕적 흥분이 과잉될 때 사회는 ‘정의’를 빌미로 더욱 잔혹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과거 종교전쟁이 그러했고 오늘날 가자지구에 대한 전쟁범죄가 그러하다. 우리 한국 사회에 자살률이 많은 이유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 번 실수하면 끝이다”라는 메시지를 가장 빨리 내면화하고, 그 절망의 무게를 가장 먼저 견디지 못한 자살로 마감한다. 갱생과 회복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서 낙인은 우리 모두의 현재를 파괴하는 도구가 된다. 이 같은 사회에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한 기독교인조차 상대를 용서하거나 반성할 기회를 주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사회는 활력을 잃고, 공동체는 서서히 자기파괴의 길로 접어든다.
우리 사회가 정죄의 과정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를 예수님은 한마디로 정리하셨다. 성전 마당 한복판에 한 여자가 끌려왔다. 그녀를 빙 둘러선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기 위해 손과 손에 돌을 쥐고 있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단서를 찾기 위해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즉답하지 않으셨다. 대신 몸을 굽혀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시 물으니 일어나서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빙 둘러섰던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모두 떠나가고 잡혀 온 여인만 남았을 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곧바로 이어서 말씀하신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예수님은 있는 죄를 없다 하거나 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죄지은 사람이 사회의 일원으로 갱생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계신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용서의 조건은 회개하므로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 그것은 정죄가 평생의 낙인이 아니라 갱생의 기회여야 한다는 대원칙을 선포하신 것이다. 공동체 사회를 향해서도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로 성찰 없는 정의감의 폭력성을 경계하시고 독선과 위선의 껍질을 벗을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셨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지금 갖춰야 할 모습이다. 사랑이 빠진 율법주의는 공허할 뿐이다. 회칠한 무덤과도 같다(마 23:27).
따뜻함을 회복해야 한다.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서로를 돌아보고 격려하며 모두의 가능성을 열므로 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