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사진 우측)과 영국 테레사 메이 총리(사진 좌측) 정상을 차례로 만나 대북제재 완화 필요성을 언급하고 협력을 당부했다.
비핵화 일정 늦추고 한미동맹 해칠 위험 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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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7일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4차 방북 당시 ‘핵무기 목록 신고’를 거부하고 종전 선언과 대북 경제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고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15일 보도했다. 김정은은 “신뢰 관계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목록을 제출하더라도 미국은 믿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재신고를 요구하며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고 거부했다. 대신 그는 “비핵화 조치는 북·미 간 신뢰 구축이 우선돼야 한다.”며, “북한과 미국의 신뢰가 구축되면 비핵화는 미국이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속도를 낼 것”이라며 북한 비핵화의 전제 조건으로 종전 선언과 대북 경제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특히 북한은 비핵화를 위한 신뢰구축의 조건으로 대북제재 해제를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리용호 외무상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제재가 우리의 대미 불신을 증폭시킨다.”고 비판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17일 김 위원장이 지난 7일 폼페이오 장관에게 경제제재 해제를 직접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북측이 미국에 정식으로 제재 해제를 요구한 것은 처음이다. 사실 북한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대북제재 해제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핵개발이 완성된 이후 핵과 경제 병진노선에서 사회주의 경제 강국 건설로 방향을 잡았다. 그가 내걸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벌써 3년차를 지나고 있다. 김 위원장이 당 간부들과 주민들에게 약속한 경제 강국 건설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는 물론 해외 자본의 대북 투자가 필수적이다. 북한이 제재 완화 공세를 무엇보다 강화하고 나선 근본적인 이유이다.
정리하면, 북한은 종전선언에 대해서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와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시험장·발사대 해체 등의 북측의 선의적 조치에 대한 미국이 이행해야 할 상응조치로서 종전선언을 주장해 왔다. 통일연구원 홍민 연구위원은 “북한이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폭파된 풍계리 핵실험장과 해체를 앞둔 동창리 미사일 엔진시험장에 대해 전문가들의 참관을 허용한 것도 ‘이것으로 종전선언 문제를 일단락 짓겠다’는 시그널”이라고 분석했다.
앞으로는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쇄나 핵물질과 핵무기 폐기 등 진전된 비핵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상응조치로서 대북 제재 해제 프레임을 짜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노동신문 등 관영 매체를 통해 제재 완화를 주장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16일자 기사에서 핵실험과 ICBM 발사 중지 조치를 상기시키면서 핵실험과 미사일 때문에 취해진 대북 제재 조치는 “사라지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했다. 또 “미국이 제재를 계속하겠다는 것은 곧 적대시정책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이고, 관계 개선을 그만두겠다는 것”이라며 북미 간 신뢰구축의 전제조건으로 대북 제재 완화를 강력 촉구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대북제재 해제를 위한 국제여론 형성을 위한 행보를 넓혀가고 있다. 북한은 폼페이오 평양 방문 당시 최선희 북한 외무상 부상이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이어 지난 9일 러시아에서 열린 북·중·러 3국 외교차관급 회담을 통해 “유엔이 대북 제재 조치를 재검토해야 한다.”며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하는 3국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이후 중국과 러시아는 대북제재 완화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 네벤자 유엔주재 러시아대사는 13일 “우리는 대북제재 가능성을 검토할 시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추이텐카이 주미 중국대사도 14일 미 방송 폭스뉴스 선데이에 출연해 “미국이 더 우호적인 대북정책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 없이 북한이 어떻게 핵무기를 포기하겠느냐”며 제재 완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앞으로 열릴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대북제재 해제 국제여론 형성에 주력하며 대북제재 해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와 모종의 대응방안을 논의하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지난 8일 문 대통령의 언급에 따르면 북한은 북·러, 북·중정상회담은 물론 북·일정상회담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해 온 한국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비핵화가 어느 정도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서서히 완화해 나가는 것까지도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해 ‘선 비핵화, 후 제재 해제’를 주장하는 미국의 태도와는 다른 새로운 비핵화 접근법을 제시했다.
미국이 아직까지 제재 완화를 언급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비핵화 단계에 따른 제재 완화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21일 마무리한 7박9일간의 긴 유럽순방에서 단계적 제재 완화 필요성을 본격적으로 개진했다. 프랑스 유력지 르몽드가 13일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회담에서 대북제재 완화를 위한 유엔 안보리 차원의 협력을 당부할 것이라고 한불정상회담 전에 이미 보도한 대로 문 대통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프랑스와 영국 정상을 차례로 만나 대북제재 완화 필요성을 언급하고 협력을 당부했다. 국제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대북 제재 완화 문제를 이슈화 공론화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영국 등은 문 대통령과 시각을 달리했다. 이 나라들은 물론 아셈(ASEM) 의장 성명도 북한 핵·미사일 및 관련 시설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CVID)’를 주장했다. 결국 대북 제재 완화로 비핵화를 촉진한다는 문 대통령의 정책은 유럽에서 먹혀들지 않았다.
유럽 국가들에게 대북 제재는 국제질서이다. 당사자의 사정이 있다고 해서 이탈한다는 것은 국제질서를 위반하는 행위이다. 국내처럼 감정에 호소하거나 여론몰이 하듯 하는 대북 전략은 국제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에 보여주었다.
그러나 북한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인 중국과 러시아를 제재 완화의 우군으로 삼고 미국을 압박하는 상황에 한국이 가세하는 형국이 됐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안 그래도 중국 시 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본격 등장하는 것이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북한 핵·미사일 실험 이후 중국·러시아는 유엔의 제재 결의안에 동의했고 이런 압박과 경고가 북한을 대화의 길로 이끈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2차 미·북 정상회담이 준비되고 있는 이때 중국과 러시아로 인해 대북제재 공조에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이 가세한 셈이 됐다.
특히 문 대통령이 국제사회에 대북제재 해제를 이슈화하므로 대북제재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논란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게 됐다. 이렇게 되면 북한은 더욱 더 비핵화 전 제재 완화 주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한미 간 입장 차이의 간극이 벌어지므로 안보 위험은 물론 앞으로 북한의 비핵화가 더 힘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북제재 문제를 둘러싼 한미 양국의 이견 갈등이 표면화하는 것은 문제가 크다. 실제로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 간 간극을 우려하는 외신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1일 북한에 대한 한미 간 엇갈린 관점이 70년간 이어온 한미동맹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FT는 특히 대북 문제를 놓고 한미 간 갈등이 표면화된 사례로 올 8월 유엔군사령부가 남북 간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공동조사에 제동을 건 사실을 꼽았다.
유엔군사령부의 웨인 에어 부사령관은 종전선언 문제에 대해서도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을 문제로 삼는 ‘위험한 비탈길’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FT는 한국의 대북 경협 재개 움직임을 놓고 미 재무부가 한국의 은행들에 선제적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도 양국 엇박자의 대표적인 예로 지적했다.
미 정부 당국자들은 특히 한국의 대북경협 재개 움직임에 대해 “북한이 아직 비핵화를 향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도 보상을 주는 것 같다.”며 내심 못마땅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와일더 전 미국 백악관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미 정부는 최근 일부 국가들의 대북제재 완화 요구에 고무돼 김정은이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속도를 늦추고 있는 게 아닌지 우려한다.”고 설명했다.
국가안보실 정책자문위원인 김열수 성신여대 교수는 “북한 비핵화 문제에서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한국·북한·미국의 생각이 서로 다르다.”며, “그래서 한미동맹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미동맹이 흔들리면 안보의 들보가 무너질 수 있다.
특히 성급한 대북제재 해제는 북한의 비핵화를 더 늦출 수 있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일 네바다주에서 열린 중간선거 관련 유세에서 2차 북미회담 시기와 관련해 “서두르지 않겠다.”며 속도 조절을 강조하고 나섰다.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2일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내년 초에 열릴 것으로 내다봤다. 백악관이 북미정상회담의 가능 일정을 내년 초로 못박아 공개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이 비핵화 시간표를 자꾸 늦추는 우선적인 이유는 우려했던 대로 대북제재 국제여론을 조성하려는 북한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계산 때문이다.
미국은 비핵화 일정의 지연을 감수하더라도 대북제재의 고삐를 죄며 북한 측으로부터 실질적 비핵화 이행조처를 받아낸 뒤 2차 정상회담을 개최하겠다는 것이다. 즉 가시적인 비핵화 성과 없이 북한에 쉽사리 정상회담 날짜라는 당근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북미정상회담이 연기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당초 예상됐던 올해 안에서 내년으로 미뤄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렇게 되면 북·러, 북·중 정상회담, 프란치스코 교황 방북 등 남북관계 관련 ‘빅 이벤트’ 분위기도 가라앉을 가능성이 크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비핵화 시간표가 계속 지연되면 트럼프 대통령의 북핵 문제 해결 열정이 차갑게 식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하원의 다수당 지위를 민주당에 넘겨주는 등 참패하면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운영 및 2020년 대통령 선거 전략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는 비핵화 협상구도가 되지 않는 한 북한 문제를 놓고 위험한 도박을 하지 않는 쪽으로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있다.
이제는 한국이 냉철해져야 한다. 미국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남·북·미 ‘종전선언’을 비롯한 연내 한반도 평화체제 기본토대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추진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