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6일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에서 열렸던 용문산기도원 제4차 학술세미나 광경. 제1발제 김명구 박사(연세대 교수), 논평 김정회 박사(서울장신대 외래교수), 제2발제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명예교수), 논평 박종현 박사(한국문화신학회 학회장)가 차례로 강연을 했다.
‘용문산기도원 제4회 학술세미나’ 요약 제2회 …
김명구 박사, 나운몽 목사의 성령운동과 국가구원관 조명
해방되자 서울로 올라가 일본인이 운영하던 연성지우라는 잡지사를 인수해 농민성보를 발간했다. 이때 수표교감리교회에서 1946년 3월에 33세의 나이로 장로가 되었다.
신간회 출신의 채규항으로부터 전국농민총연맹 부위원장이 돼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정치적 참여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그의 비정치화 의식은 1907년 이후 각인된 한국교회 일반의 전통이었다.
1946년 6월경부터는 KNCC의 기관지인 ‘기독교공보’를 운영하였다. 사업은 번창하던 중 일제시대의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가 내분을 겪고 있을 때 교역자 비행 진상조사위원단이 구성되었다. 조사위원단의 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나운몽은 평신도로서 교역자의 비리를 조사하여 폭로해야 하는 것이 양심에 거리낌을 받았다. 흠이 없는 인물이 거의 없었음에도 깊은 상처들을 서로 들추어냈고 불명예를 씌웠다. 서로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도를 넘었고 교회가 분열되는 것도 개념치 않았다.
젊은 나운몽은 교계의 갈등에 환멸을 느꼈다. 현실적 생태구조와 유토피아적 이상이 연결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높았던 이상과 현실 사이 괴리를 해결하지 못하고 문서선교 사업을 비롯한 서울에서의 생활을 모두 접고 1947년 용문산으로 돌아갔다.
4. 애향숙의 재건과 성령운동의 시작 - 방식의 전환
4.1 애향숙 재건
용문산으로 다시 돌아온 나운몽은 밤에는 산에 가서 기도하고 낮에는 산을 내려가서 노방전도를 했다. 금릉군 아천에 면장 관사를 사서 고등공민학교와 아천감리교회를 세웠고 상주군 옥산에도 고등공민학교를 세웠다. 영동군 매곡에도 교회와 고등공민학교를 세웠다. 1947년 4월 5일 숙생 5명을 모아 애향숙을 재건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길 꿈 꾼 ‘사랑나라 건설’이 목적이었다.
1947년 8월 15일에는 광복 2주년, 입산 7주년 기념집회를 초교파적으로 열었다. 고려신학교, 감리교신학교, 조선신학교, 서울신학교, 중앙신학교의 교장을 초대했고 장로교신학교 신학자 박형룡과 감리교 신학자 방훈이 참석해 집회를 인도했고 전국의 교역자 800명 가량이 모였다. 1948년 4월 1일에는 제1기 심령수련회(제2기 한달 단기 수련을 제외하고 학교 형식의 3~6개월씩 갖는 장기 수련을 53년 4월 제7기 수련회까지 개최함; 편집자 주)를 열어 10명의 수련생을 내었다. 그러나 6.25가 발발했고 나운몽과 가족은 피난 길에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운몽은 결국 북한군에게 붙잡혀 김천 감옥에 가는 등 모진 수난을 겪은 뒤 극적으로 용문산에 다시 돌아온다. 하나님이 자신을 쓰실 것이라는 확신에 나운몽은 전쟁 중에 10여명의 학생들을 모아 애향숙을 다시 시작했다. 1.4후퇴 소식을 들었을 때도 피난을 가지 않고 “그냥 죽을 수는 없다. 전도하다 죽자”라고 결의하고 십자군 백의전도대를 만들어 흰 광목으로 코트를 만들어 입고 허리에는 띠를 묶고 학생모에 흰 카바를 씌워 쓰고 흰 기에는 붉은 십자가를 그렸다. 그들은 김천 시내에 나가 전도를 하였다. 1951년 1월 이들은 백설이 쌓인 용문산에서 성경공부와 기도로 수련을 하였다.
4.2 성령운동의 시작
나운몽은 1942년 신비한 회심의 체험을 했고 1946년 금식기도 중 영음을 경험했었다. 그러다 1951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구국기도를 하던 무척산 기도원 원장이자 고신 출신의 여성 부흥사 명향식이 “피난지는 용문산이다. 그곳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용문산에 입산했다. 그들은 설교가 끝나고 통성기도를 하는데 입신을 하고 방언 현상이 나타났다. 그때 그들은 “불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당시까지도 나운몽으로서는 낯선 광경이었다. 명향식 일행이 받았다는 불에 대해 궁금했던 나운몽은 용문산 삼선봉에 올라가 밤새 기도를 했다. 이 때 성령의 체험을 한다. 성령체험의 방식은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거부감이 없었다. 이 체험 후 나운몽에게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이후 1952년부터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을 다니며 심령부흥회를 인도하며 성령을 강조했다. 기사와 이적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언제나 있어 왔다. 신유의 역사는 언더우드에게서도 있었고 감리교 선교사 존스에게서도 나타났다. 또한 길선주도 부흥회 초기에 기사와 이적, 신유의 역사가 있었다. 1904년 하디가 제물포에서 부흥회를 열었을 때 100여 명이 회심을 한 것이 계기가 돼 1910년 강화 마리산 부흥회가 시작되는 등 서부 감리교 선교지역의 신앙 양태의 변화가 일어났다. 1920년대 김익두, 1930년대 이용도 등의 부흥집회에도 신유가 목도되고 이사와 기적이 나타났다. 1928년에야 오순절 교회도, 미국 오순절교회 평신도 선교사 럼시가 한강 변을 중심으로 한국선교를 시작했을 때 은사 운동을 강조했다. 망원동 뚝섬을 연결하는 한강촌은 무당촌이어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다. 은사를 주제로 한 성령운동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낯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령역사가 죽어갔다가 나운몽에 의해 전국적으로 퍼져가게 되었다. 나운몽의 성령운동은 기도원운동으로 연결되었고, 한국 전체로 확산되었다. 또한 한국교회 부흥회와 1960년대 이후 순복음교회의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정착했다. 한국교회 부흥집회가 있는 곳에는, 특히 성령의 임재를 주제로 하는 부흥회에서는 나운몽의 방식이 중요한 도구로 정착된 것이다.
4.3 기도원운동
나운몽은 당시 애국 의식과 기독교의 복음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았던 한국 기독교인 일반과 다르지 않은 태도를 갖고 있었다. 구령과 구국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고 기독교인의 사명은 개인 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나라를 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역사의 주재자에게 구령의 영역과 국가 구원을 간구하는 그의 행위는 한국 복음주의계의 일반과 다르지 않았다. 민족이 복음화되면 나라가 구원된다는 의식이었다.
그의 그런 의식은 국가적 과제가 있을 때마다 역사의 주재자에게 하소했던 구국기도제단으로 나타났다.
박정희 시대는 극과 극의 시대였다. 무조건 ‘잘 살아보자’가 지상 명령이었고 무한 경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패배자가 나타나고 하소연할 데가 없는데 생명의 샘으로서 하늘을 바로 보게 한 것이 기도원이었다. 탈진했던 사람들에게 선한 일꾼으로서 믿는자의 의식을 각인하므로써 시대적 요청에 응답한 형태였다. 즉 기도원은 도피성이 아닌 해방구였고,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용문산 기도원을 시작으로 한얼산, 오산리, 다락방 등 각 교파로 확장돼 나갔다. 특별히 용문산 기도원 운동은 구령과 구국을 정체로 삼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