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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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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성령운동 일어나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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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산기도원은 교파를 초월한 성령운동의 본산으로 한국교회 교단 화합과 쇄신 등 성령운동 확산에 크게 기여해 왔다.(사진은 1961년 10월 용문산기도원에서 열렸던 제1회 전국 교역자 구국산상기도대회 모습.)

단절된 성령운동의 맥 찾는 일부터 시급 …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이타적 신앙 회복해야 한국교회 부흥 (행 1:8, 요 12:24)

성령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성령 강림에 의해 탄생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 5)”

성장도 성령이 있어서 가능했다. 성령이 아니면 복음이 세계에 전파될 수도, 세계 제1의 종교로 성장할 수도 없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기독교는 성령의 역사를 뺀 역사적 기록이나 종교적 교리나 학문적 논리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전제되지 않는 기독교는 생명 없는 박제된 기독교일 뿐이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 5).” 성령으로 인해 기독교는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현실 속에 나타내 보이시고 섭리하시며, 인간과 삶과 사회와 역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종교가 될 수 있다. 이렇듯 성령과 기독교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강력했다. 정부 통계에 의하면 1960년에 한국교회 교인 수는 62만 명(전체 국민의 2.48%)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995년엔 875만 명이 됐다. 불과 30여년 만에 무려 1400%가 성장해, 국민 5명 중 1명이 기독교인(1995년, 국민의 19.4%)일 만큼 어엿한 기독교 강국으로서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 전파가 이뤄진 근세의 세계 선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세계의 많은 학자들이 이 신기한 현상을 연구해왔지만 이상하게도 한국 성령운동이 분파주의로 이해되거나 중요한 성령운동이 교회사에서 아예 빠져 있어서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성령운동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성령운동이 아니고는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성장을 설명할 수 없고 앞으로 침체된 한국교회를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교회가 다시 성령운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운동의 본질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한국 성령운동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까. 지금의 문제는 한국교회가 분명히 세계 선교사에 유례없는 부흥을 이룩했는데, 그 원인인 성령운동의 중요한 페이지가 한국교회사에서 빠져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부흥을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성령운동의 맥에 줄을 잇지 못하고 있다.

서영석 교수(협성대)는 ‘애향숙 용문산기도원과 기도원운동(2014)’ 논문에서 “한국교회사를 얘기할 때 용문산기도원운동에 대한 부분이 빠져 있었던 점”이 문제라고 전제하고 “용문산기도원은 끊임없이 이단시비가 걸리므로 나운몽과 용문산운동이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하였다”고 그 원인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러나 이단시비에도 불구하고 용문산기도원은 전쟁을 전후한 혼란기에 성령운동을 확산시켰다”며 “195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성장하는데 그 원동력은 성령운동이었다”고 밝혔다.

한국교회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50년대 후반부터 기적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성령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것이 한국교회 성장기를 이끌었다. 당시의 한국 성령운동의 대표 주자가 용문산기도원 나운몽 장로였다. 당시의 증언자들은 용문산기도원의 나운몽 장로에 대해 분명히 말한다. “한국 땅에서 그보다 더 많이 영혼을 구한 사람을 찾으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온 정력을 쏟은 것은 복음 증거와 이 복음에 씌어지는 일군양성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교계 정치에 뛰어들었다면 대단한 성공을 거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온 정력을 쏟은 것은 전도와 전도자 배출밖에 없었다”(최거덕 목사, 예장 증경총회장)고 증언한다.

그가 없이 한국성령운동을 말할 수는 없는 만큼 한국성령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운몽 목사가 50·60년대에 주도해간 한국 성령운동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국교회 부흥의 산파 역할을 했던 한국 성령운동의 성격은 무엇이고, 나운몽 목사의 성령운동이 한국교회 성장에 얼만큼 큰 영향을 미쳤을까.

당시는 성령부재현상이 심화되고 있을 때였다. 서영석 교수는 위 논문에서 용문산기도원의 성령운동의 배경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당시 한국교회 안에 성령부재 현상이나 기성교회의 제도적인 부조리가 나타났다. 또한 극단적이며 폐쇄성향을 가진 기성교회의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과 신앙지도의 반작용으로 기도원운동이 발생한 것이다.” 즉 한국교회가 갑자기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이룩한 데엔 성령운동이 괘를 같이했다. 성령운동으로 인해 50년대 말부터 70년까지 100만 명 이상의 교인이 급속히 늘어 1970년 교인 수가 220만 명이 되었다. 전도열에 불타는 이들이 각 교파 교회에 들어가 교회 부흥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70년부터 더욱 가속도가 붙어 77년 5백만 명을 돌파했고, 1989년엔 천만 명(기독교문사, 종교단체 제출자료 집계 1989.6.30.)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교회성장이 본격적으로 촉발된 60년대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1946년 기감 수표교교회 장로 장립을 받은 당시 나운몽 장로는 1947년부터 용문산기도원에서 심령수련회를 개최하는 등 본격적인 기도원운동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이던 1952년부터는 대구를 선두로 전국적인 성령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당시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365일 내내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전도집회를 인도했다. 이 여파로 1954년 대한기독교 부흥전도연합회를 결성했고 그 해 개최된 용문산기도원 제15기 집회였던 한민족유월절 8월 성회에 3만 명이 운집했다. 당시의 증언자들에 의하면 용문산 전체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국교회 교인이 50만 명이 되지 않던 당시에 이것은 기적이었다. 나운몽 장로는 더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교파와 상관없이 교회 없는 동리에 교회 세우기 운동인 ‘일동일교회운동’으로 500여 교회를 설립했고, 수도사를 배출해 전국 70여 개소에 기도원을 세웠다.

이 같은 50·60년대의 성령운동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나운몽 장로가 전개한 성령운동의 특징, 목표, 성격을 각각 두 가지씩 추려 보자. 용문산기도원이든 전국순회든 나운몽 장로 집회의 첫째 특징은 불신자들이 대거 참여해 성령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한 사실이다.

둘째 특징은 교파를 망라해 초청하는 교회는 어디든 가서 부흥회를 인도한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은혜 받은 철저한 전도신앙으로 무장한 이들이 각 교회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 교파를 망라해 한국교회 전반의 성장과 부흥에 영향을 미친 주요 이유이다. 1961년 전국교역자산상구국기도회가 용문산기도원에서 열려 교파를 망라해 전국 교역자 803명과 신도 2000여 명이 모인 것은 그가 전개한 전국적 초교파 성령운동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 그 이후로도 용문산기도원은 교파를 초월한 성령운동의 본산이 되었다.

김찬국 교수는 ‘용문산기도원운동의 진단(1970, 신학논단, 연세대 신학회)’에서, “이미 각 교단 교역자들까지 용문산에 가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자기 교회 교인들의 열성적인 영적 만족을 위한 기도를 위해서 교회 자체의 부족한 면을 시정하고 나가야 할 것”이라며 더이상 “한국의 기독교 교단들이 규제에서 보다 적극적 태도로 용문산운동을 연구하고 교회와 협력할 수 있는 공동과제도 모색해보아야”한다고 촉구한 이유이다. 그만이 아니라 당시 집회 초청이 밀려 용문산 신학생과 수도생들이 나운몽 장로를 대신해 전국으로 나가 부흥회를 인도했다. “용문산은 수많은 전도자를 배출, 한국교회 부흥의 한 진원지가 됐다”(1992. 기독교대백과사전, 기독교문사)

나운몽 장로의 성령운동은 두 가지 분명한 중심 푯대가 있었다. 그 첫째는 한국복음화였다. 1950년대에 용문산기도원에서 나운몽 장로를 통해 은혜를 받고 병 고침을 얻은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는 “나운몽 목사님은 한국복음화를 제일 먼저 주창하고 말로써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한 분”이라고 증언한다.

둘째는 구국운동이었다. 서영석 교수(협성대)는 ‘애향숙 용문산기도원과 기도원운동’ 논문에서 “그에게 있어 민족적 소명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었고, 한국복음화운동, 북진운동, 구국기도운동 등을 전개한 원인이었다.”며, “용문산기도원의 성령운동은 민족적 시련에 지쳐있는 겨례에게 한국의 소망을 불러일으켰고 한국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고 밝혔다. 이 두 가지 목표는 동시에 당시 성령운동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한국교회부흥을 이끈 성령운동은 지금처럼 개인 중심적인 신앙 추구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당시의 성령운동의 성격은 첫째, 철저히 나라와 이웃을 위한 이타적 신앙 양태로서 전개되었다. 나운몽 장로는 “개인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은 썩을 것을 구하는 사상이다”(‘생명 있는 사상과 생활’ 1956)며 각자의 이기심이나 기복신앙을 버리는 것이 모두를 살리는 참 신앙의 길임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작은 나’인 개인이 아니라 ‘큰 나’인 민족을 살리는 기독교인상과 한국교회상을 제시했다.

둘째 성격은 철저히 성경 중심적이었다. 나운몽 장로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었고 교리보다 성경말씀을 우선시했다. “그는 성경 본문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해 성경에 있으면 진리, 없으면 사이비였다(‘나운몽신학’ 감신대 이덕주 교수).” 나운몽 장로는 기성교회의 교리 분쟁과 교파 싸움, 율법주의적인 신앙 지도를 극복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의 취지로 돌아가고자 했고,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그는 신비체험이나 이사와 기적보다 말씀을 중심한 성령운동을 전개했다.

결론적으로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교회적 사명을 잃어가고 세속주의에 물들어가며 사회적 비판과 침체에 직면한 한국교회가 살 길은 성령운동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50,60년대 한국 성령운동을 주도해간 나운몽 장로의 성령운동에서 그 맥을 찾아보면 단순한 외형적 이기적 신앙 양태로서 이적과 기사와 기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본질과 역할에 충실했고 사회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는 이타적 신앙이 초점이었다. 결국 이때 은혜 받은 한국복음화와 구국의 일념과 사명감을 가진 신앙인들이 각 교파에서 ‘나’를 희생한 전도의 역군이 됐고 한국교회 부흥의 촉매가 되었던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한국교회가 새로운 부흥의 시대, 한국사회를 선도하는 교회의 역할을 회복하는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단절되었던 성령운동의 맥을 잇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