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
한 사람이라도 실족케 하지 말 것과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할 것 가르친 성경 기준삼아야 (마 8:6, 고전 10:24)
코로나19로 맞은 전례없는 위기의 시대에 한국교회도 동시에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코로나 재확산을 촉발한 원인자로서 한국교회가 코로나 위기의 중심에 서면서 선교사상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한국교회의 대면예배에 대한 고집은 스스로 위기를 부른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정부는 지난 19일부터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 소재 교회에 대해서 비대면(온라인) 예배만 허용하는 행정조치(집합 제한)를 내렸다. 이후 부산 충남 대전 광주 등 일부 지역에서도 대면 예배 금지 행정명령 조처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온라인 예배 제작에 필요한 인력 20명 이내만 내부 입장이 가능했지만, 행정명령 첫주부터 현장 예배를 강행하다 적발된 교회가 2000곳(수도권 919곳, 인천 378곳, 충남 751곳, 부산 279곳 등)에 달했다. 둘째 주인 지난주에도 서울 40곳, 부산 42곳, 대전 100여곳, 인천 23곳, 광주 12곳, 충남 10곳이 적발돼 언론의 집중타를 맞았다.
광주시로부터 고발당한 한 교회는 교인들에게 “교회가 세상사람들과 타협하고 섞이면 안 된다.”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사전에 보내 행정명령을 알고도 예배강행을 고집했음을 보였다.
대부분의 교회는 행정명령에 잘 따르고 있지만 일부 교회에서 아직도 안지켜지는 이유는 한국교회 전체의 반발 분위기가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7일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한국 개신교회 지도자 간담회를 열고 교회의 방역 협조를 요구했다. 이에 기독교계를 대표해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회장은 “종교의 자유를 너무 쉽게 공권력으로 제한할 수 있고 중단을 명령할 수 있다는 것에 크게 놀랐다”면서 “정부가 방역을 앞세워 교회를 행정명령하고, 교회는 정부 방침에 반발하는 것은 국민에게 민망한 일”이라며 “종교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또 제한적 대면 예배 허용을 요청하면서 “전체 교회를 막는 현재의 형식은 오래가지 못한다. 정부도 부담이 될 것이고, 교회도 결코 동의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의 발언은 정부가 대면예배를 억압적으로 금지하는 등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한국교회의 반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물론 교회 대표자로서 교회의 사정을 대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교회 입장만 강조하는 것으로 비춰지고 역효과를 부를 수 있다. 그보다는 국민의 안전에 촛점을 맞춰 교회가 이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할 주체로서 나설 기회를 얻고, 방역에 적극 협조하므로 국민을 끌어앉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지금의 교회와 모두를 위해 더 필요한 상황이다.
어제오늘의 일만이 아니다. 지난 3월 신천지의 대규모 집단감염 이후에도 교회발 감염은 계속 논란을 일으켜왔다. 사랑제일교회 사태 전인 1~7월 사이에도 교회 관련 확진자가 153명으로 서울 전체 확진자(1603명)의 9.5%를 차지했다. 정부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교회 발 감염이 이어지자 7월 8일 정규 예배 이외의 소모임을 금지했다. 이때도 교계는 각종 논평과 규탄 시위를 통해 거세게 반발했고, 결국 소모임 금지 조치는 2주 만에 해제되었다. 교회가 반발한 주된 이유는 왜 다른 종교에 대해선 금지 조치가 없고 교회만 차별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 조치는 차별이 아니었다. 그동안 교회가 방역 수칙을 잘 지켜서 감염자가 없었다면 탄압일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1단계 거리 두기 시작한 지난 5월 6일 이후 8월 26일 현재까지 교회 관련 확진자는 1,681명이지만, 사찰이나 성당 관련 확진자는 0명을 기록 중이다. 지난 31일 서울시는 “최근 한 달간 확진자 과반수가 교회 관련”이라고 밝힌 데서도 알 수 있듯 교회 발 집단감염은 심각한 정도를 넘어서 있다. 그렇기때문에 지금 대다수 국민은 교회가 계속적으로 보여주는 자기중심적이고 모두를 생각하지 않는 집단이기주의적인 태도에 공분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 간 교제를 중시하고, 구역예배, 성경공부, 수요예배 등 모임이 다양하고, 개교회 중심적인 개신교회의 성격상 코로나바이러스에 더욱 취약하다. 따라서 일찍부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보다 치밀하게 바이러스에 대처했다면 오히려 타 종교와 국민의 귀감이 될 방역 모범사례로서 코로나 정국을 리드하고 그동안 한국교회가 받아온 비난을 극복할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또한, 가톨릭처럼 중앙감독체제가 아닌 개신교회의 특성상 방역을 개교회가 하는 대로 맡겨 두지 말고 교단 연합기구를 통해 통일된 방침이나 대응을 해야 했다.
각 교단이 구심점이 돼 공동방침이 개교회까지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개교회의 필요사항을 파악해서 지원하는 체제를 갖추는 노력도 필요하다. 나아가 ‘예방적 원칙’에 입각해서 선제적 조치를 하는 것이 취약한 구조의 교회가 코로나 시대에 취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확정적 증거가 없어도 잠재적 피해가 예상되면 그 피해를 예방하는 쪽으로 조치해야 한다는 보건·의학 등 분야에서 통용되는 원칙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생명을 위협하는 수많은 탄압 속에서도 예배를 지켜왔다. 가정에 숨어 드리던 지하교회, 카타콤(지하묘지) 등 장소에 구애받지 않았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장소가 어디든 예배처소가 될 수 있다. 사회 변화에 따라 예배의 형식도 달라졌다. 성경은 예배의 형식을 특정하고 있지 않다. 요즘 같은 필수 불가결한 비대면 시대엔 가족이나 친구 두셋이 함께 예배하면서 온라인 서비스를 이용해도 되고, 요즘은 독신이 많으므로 온라인으로 연결돼 같이 예배드리면 된다. 자가격리 자라 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예배에 참여하면 된다.
과거에도 종교집회는 언제나 전염병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구약시대 때 정결법(레 11-15장)은 전염병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예방적 원칙’의 좋은 선례이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손과 발을 씻어야 하고, 질병에 걸린 사람은 공동체의 거주지로부터 일정 기간 격리했다. 정해진 격리 기간이 지나면 정결하게 됐는지의 여부를 공동체 대표가 확인한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날의 코로나 대책과 별반 다르지 않다. 즉 감염병에 걸렸거나 감염이 의심되는 예배 참여를 제한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다. 교회와 공동체를 보호하고, 공동선을 이루는 것이 교회의 우선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 흑사병이 확산될 때도 칼빈이나 루터는 헌신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위약에 빠진 환자들을 돌보았지만, 성도들이 예배당을 떠나 피신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배의 본질은 모두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함이지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일부 교인들은 흑사병을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라며 치료 약도 쓰지 않고, 감염된 사람과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행동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들을 향해 “약을 먹고 주변을 소독하라. 사람과 장소를 구별하라. 나의 무지로 이웃이 고통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외쳤다.
신앙의 선조들이 숱한 박해와 탄압 속에서 예배를 지킨 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피신하고, 특정 예배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숨어들어서 예배를 이어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모두의 생명을 구하자는 정부 조치를 탄압으로 여기고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금은 탄압이 아니고 모두 같이 살자는 것이므로 오히려 적극 협력해야 한다. 이웃이 고통받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선제적으로 강구하고, 남의 이익을 구하고 공동선을 추구해야 할 교회가 먼저 앞장서야 할 일인데도 거꾸로 종교 탄압으로 여기는 것은 너무 잘못된 인식이고, 자신조차 사지로 내모는 자기모순이다.
교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예배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면 이미 예배의 본질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지금의 행동은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는 행위가 아니고, 교회와 공동체를 지키는 것도 아니다. 남을 위하는 행동도 아니고, 오히려 남에게 해악을 끼치고, 성경의 가르침의 본질에서 어긋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