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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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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운동 이끈 나운몽 목사 소천

성령운동 이끈 나운몽 목사 소천 관련 기존 복음신문 사진
기존 복음신문 「성령운동 이끈 나운몽 목사 소천」 기사 사진 · 사진 복음신문 제공 · 복음신문 보유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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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복음 전파에 바친 평생…

한국 교회에 애국적 신앙부흥운동의 큰 틀 세워

1950, 60년대 전국적인 성령운동을 주도하며 한국 교회 부흥의 산파 역할을 했던 나운몽 목사(향년 96세)가 26일 노환으로 소천하였다. 동아일보 등 신문들은 “성령운동 1세대 나운몽 목사 소천” 소식을 전하며 “한국 개신교 초기 성령운동을 주도했다”고 평했다. 그는 ‘성령’을 말하면 곧 이단으로 여겨지던 시절에 성령운동의 불을 붙였다. 그가 없이 한국 교회의 성령운동을 말할 수는 없다. 당시 평신도 장로이던 그는 1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이끌었다. 월요일 새벽에 집회를 마치면 한나절에 다음 집회 장소로 이동해 월요일 저녁부터 다시 1주일씩 집회를 여는 식이었다. 그의 일정은 부흥회를 요청한 수백여 교회들로 밀려있었다. 용문산 기도원내 기드온신학교에서 공부하던 학생, 수도실에서 수도하던 수도생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나가 그를 대신해 전했다.

그의 설교는 두어시간이 넘게 계속돼도 막힘이 없었다.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폭포수처럼 숨 쉴 틈 없이 말씀을 증거했다. 장내는 눈물바다이자 성령 역사의 도가니로 화했다. 그가 어느 지역에 온다는 소문만 나면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강사가 모여든 인파를 뚫지 못해 어깨위로 네 발걸음을 하여 강단에 오르는 믿기지 않는 일들도 벌어졌다. 그의 집회에서 은혜받은 사람들은 전도할 또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용문산기도원에서 열리는 산상 집회로 몰려들었다. 주야로 침식을 같이하며 열리던 산상 집회에서 성령의 역사는 더 크게 일어났다. 그의 전국 순회전도집회가 계속될 수록, 용문산기도원의 산상 집회에 더 많은 인파가 몰릴수록, 교계의 핍박이 거세갔다.

김진섭 한국언론회 고문은 “이같은 현실을 시샘하는 성직자들의 험구는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6.25 이후 중앙일보 시절 종교난 기획중 용문산기도원 성회에 수만명의 신도들이 전국에서 모여 보기드문 일대 대성회를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이같은 운집이 산골짜기에 일어난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어 보도했음에도 ‘나 장로가 무슨 기적을 일으켜 사람을 모았겠냐’고 비난을 가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면서 “현장을 확인하고 보고 느낀 그대로 현실을 보도하고도 비난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교계 지도자들의 무고로 투옥된 것도 그때였다. 1955년 5월 나운몽 목사는 예장 목사 28명이 연서한 ‘김일성과 연계된 국제 공산당원’이라는 취지의 고발로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구속됐다. 당시 전국을 들썩이던 ‘나장로’의 구속이었기에 일간지마다 톱으로 다뤄졌다. 결국 이 사건은 나운몽 목사 자신의 장담대로 27일 만에 무죄 석방되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면서 오히려 그가 주도하던 성령운동이 더욱 확산되었다. 그 이후 그가 펼치던 성령운동이 3겹줄 전도운동(구설전도, 문서전도, 기도전도)으로 본격화되었다.

그의 전도운동은 어떤 세를 불리려 함도 아니었고, 교파주의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그만큼 그의 전도운동은 순수했다. 최거덕 목사(예장 증경총회장)는 “한국 땅에서 그보다 더 많이 영혼을 구한 사람을 찾으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온 정력을 쏟은 것은 복음 증거와 이 복음에 씌어지는 일군양성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증언한다.

지금은 ‘한국복음화’를 한국 교회의 사명으로 알 정도가 됐지만 당시에 ‘한국복음화’라는 말은 이단으로 취급될 정도로 생소했다.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는 “나운몽 목사님은 한국복음화를 제일 먼저 주창하고 말로써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한 분”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설교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은 민족애와 구국의 사명감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6.25 전쟁 이후 상처입고 좌절하던 백성에게 한국의 소망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우리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기를 염원하며 선지자적 사명을 다했던 시대의 큰 별이었다. 시공관 강연, 장충단 강연, 국민회관(국회의사당) 강연 같은 시국강연들과 한국민의 자주 의식을 전세계에 알린 2.7의거(1968)는 그 일단이었다. 그의 구국신앙의 표본은 용문산기도원에 세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제단이 말해준다. 지금도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을 한시도 쉬지 않는 릴레이 기도로 46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에게 전도와 구국 사상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가 이같은 일에 씌어질 사명자들을 기르기 위해 설립한 기드온신학교(1956)는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새벽 4시부터 밤10시까지 짜여진 시간표대로 영성개발과 성경연구, 전도훈련에 전념했다. 지식으로 배워서 아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닌, 받아서 전하는 진정한 사명자를 길러내기 위한 기드온신학교는 한국 기독교 신령신학의 효시가 되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그의 성령운동은 인간적인 의지나 계획으로는 불가능한 것임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을 체험하는 영성 개발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장광영 목사(전 기감 감독회장)가 그의 장례예배 설교에서 “나 목사님은 영계의 거성이었다”고 지적한 이유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를 차단하고 이단시하려는 사람들은 그를 ‘혼합주의’라는 한 단어 안에 가둬두려 한다. 그가 유불선 등 전통 종교의 가르침을 모두 거부하지 않고 성경 말씀에 비추어 이해하려 한 것은 안 믿는 사람, 전통 신앙을 가진 모든 한국 사람에게 복음의 소식을 전하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를 상황화 신학의 틀로 이해하려할 때 범하는 오류는 기독교의 토착화 시도라는 단순논리로만 접근한다는 점이다. 그는 뜻 없는 기독교의 토착화를 시도한 것이 아니라 한국복음화를 위해 토착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려고 했던 것이다. 즉 복음을 변질시킴 없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녹여낼 상위의 진리로서 복음의 큰 틀을 제시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 사상사적으로 볼때 나라와 민족에 대한 교회의 현실참여의식은 그의 부흥운동 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애족적 신앙부흥운동은 현실상황과 인류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와 불가분의 관련성을 지닌다는 현실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한국 교회가 그를 외면한 결과로 그의 애족적 신앙부흥운동의 맥이 끊긴다면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축복신앙이 강조되면서 신앙의 양태가 개인화하고, 교회적 사명을 잃어가는 것은 민족적 비극이다.

축복과 개교회 성장주의의 이기적인 이미지로 굳어진 오늘날의 한국 교회에 비춰볼 때 그는 한국 교회가 나아갈 큰 그림을 제시한 선지자였다. 복음을 국가와 민족복음화의 큰 틀에서 이해하고 실천했던 그의 사상은 교회를 세상과 함께, 세상의 소금이자 선도자로 서게 하는 큰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가 한국 교회 부흥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한국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한국 기독교 부흥의 뿌리를 찾고, 성령운동의 줄기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위대한 유산인 고인의 삶에 감사드리며 온 마음으로 고인을 추모한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