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신문 · 주간 신문“성경으로 과거를 해명한다! 성경으로 현실을 인도한다! 성경으로 미래를 예언한다!”성경으로 현실을 인도합니다
성경과 현실

성경과 현실

시민역량 강화, 방역대책의 중심 돼야

GOSPEL TIMES
이 기사 공유

▲국내 유입된 외국인 근로자의 코로나 감염률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최근 서울지하철 1호선 구로역 앞 광장에서 코로나 의무 검사를 받으려고 줄을 서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

정부와 시민 협력해 지금의 방역 수준 한 단계 높이는 결단 필요 …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며(갈 6:9), 위정자 위해 기도하라 (딤전 2:1, 2)

걱정인 것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만들어 준 통제의 단맛을 보고, 이를 권력의 보루로 삼은 정권이 앞으로도 쉬운 통제수단을 쉽게 놓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안전이라는 명분을 갖춘 쉬운 통제, 통제 속 선심 돈풀기, 공고해지는 추종 세력, 선출된 다수 권력의 힘으로 법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모든 상황이 정권 연장의 의도와 맞아 떨어지는데, 그 맛을 쉽게 잊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말이 경고처럼 꽂히는 이유이다.

그는 코로나 방역을 위해 규제와 감시를 아주 긴급한 위기 상황에서 임시적으로 도입한다 하더라도 결코 해선 안된다고 반대한다. 그 이유는 “임시적 조치는 대게 위기상황이 종료되어도 지속되기 마련”이라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도 국가는 규제와 감시의 정보 통치의 새로운 영역을 계속 발굴할 수 있다. QR코드로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국민 이동 동선과 개인 정보들, 통제로 얻는 정권의 어부지리 같은 유혹들을 쉽게 버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위기에서도 유발 하라리의 경고대로 규제와 감시, 통제는 쉽게 다시 사용될 수 있다.

누구나 염려하는 기후위기, 에너지 위기는 명분을 갖춘 정보 통치 권력을 확장할 수 있는 좋은 알리바이이다. 누가 탄소 배출을 함부로 하고 있는지? 누가 에너지를 낭비하는지? 위기가 커질 수록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명분과 구실이 생길 것이다. 앞으로 또다른 바이러스 출현 상황이 와도 마찬가지다. 국민은 온갖 통제 상황에서 살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자기들만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독선적 권력일수록 ‘옳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 통제의 유혹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우리나라는 선진적 검사 시스템으로 많은 검사가 이루어진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이뤄진 코로나19 진단 검사 건수는 총 735만5천964건이고, 이중 확진은 99,421명이다. 전 국민의 0.2%이다. 전체 검사자 수의 1.35%가 확진자인 것은 집단 감염과 의심 신고된 감염 검사를 합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 명의 감염자도 없어야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과도한 공포감, 이에 따른 통제와 획일적 규제로 인한 경제적 피해와 삶의 질 저하, 자유의 속박, 권력 수단으로의 이용, 국가 재정 악화, 미래의 담보 등 한국사회와 한국의 미래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 너무나 크다. 온 나라에 코로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모든 삶이 유보되고, 국민 피해가 늘고, 국가 시스템이 멈추어야 하는 것만큼은 이제는 없어야 한다. 이제 우린 새로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를 위해 방역 정책을 획일적 통제에서 개인의 자율권 확대로 전환해야 한다. 당국의 통제가 중심이 되는 것은 국가 권력이 모든 것을 규정하고 이끌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발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그 과정에서 중앙정부가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자원의 생산과 배분 과정에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하이에크는 ‘치명적 자만(1988)’ 저서를 통해 사회주의가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 오류였으며, 이 같은 이상론을 펼친 사회주의자들은 ‘치명적 자만’에 빠진 것으로 단언했다.

정부가 모든 것을 규정하는 ‘계획된 질서’는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더욱 불가능하다. 하이에크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목적과 프로그램을 달성하는 것이 사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 방역 정책의 획일적 통제가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이유이다. 앞으로는 자율과 책임 중심으로 방역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지금의 방역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결단이 필요하다.

방역 정책의 전환을 위해 첫째, 시민의 방역 역량을 강화하는 정책으로 바꾸어야 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개인정보 중 양자택일하라고 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를 막고 우리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전체주의적 감시체제를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 시민적 역량강화를 통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시민의 방역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훨씬 방역을 위해 효율적이다. 그래야 획일적이 아닌 맞춤 방역이 가능하고, 많은 것이 희생돼야 했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것은 시민을 믿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보통의 한국 국민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1년 동안 모두가 같이 코로나19의 해결 방법을 알고, 또 공유하며 정부의 방역 대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세계 어느나라 시민보다 우수한 시민이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뚜렸한 근거도 없는 일방으로 정한 거리두기의 획일적 통제와 희생으로 국민의 삶 자체가 파괴되고 있다. 개인은 물론 잘 지키는 교회와 단체, 잘 지키고 확진자가 없는 가게가 단체기합 받듯 공동으로 똑같은 적용을 받고 피해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가령 공용 시설 이용 시 금지, 규제, 폐쇄를 획일적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규정을 두면 된다. 즉 몇 m의 충분한 간격과 필요한 넓이의 공간에 맞게 수용 가능한 인원이 나오고, 카페든, 헬스장이든 공간 크기에 맞게 거리를 지키며 충분히 영업을 지속할 수 있다. 형평성 논란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교회에서 집단 감염이 많이 발행했지만 그것은 전체 교회의 극히 일부이다. 방역 수칙을 잘 지켜 한번도 발생하지 않은 교회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잘 지키든, 못 지키든 모든 교회가 전체 좌석 수의 20%, 수도권 외 지방은 30%만 예배볼 수 있도록 허용되고 있다.

그러나 극장이나 공연장은 ‘한 좌석 띄어 앉기’만 하면 인원 제한 없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형평성의 문제는 획일적 규제 중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면 어디에서 발생했는지를 역학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까지 그런 조사가 다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편한 획일적 규제만 하고 있다. 그런 논란이 나오지 않도록 자율권을 확대하되, 책임을 무겁게 하면 된다. 카페든, 헬스장이든 자기 영업점에서 확진자가 나오지 않도록 스스로 각별히 조치하고 더 신경 쓸 것이다. 안그래도 마스크 착용, 손소독, 안전 거리두기 등으로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코로나 방역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자발적 참여의 영역이고 이 최소한의 규정조차 안지킨다면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

둘째, 거리두기 단계도 조정이 필요하다. 현재는 확진자 수에 비해 과도한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유럽보다 500배 이상 과도하고 엄격하게 높은 거리두기 단계를 적용하고 있다. 즉 미국이나 유럽은 코로나 폭발 단계를 인구 10만 명당 25명, 즉 우리나라로 치면 1만2960명 발생 수준에서 규정한다. 이러한 과도한 규제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정신적, 다른 피해에 비해 감염자를 줄이는 실질적인 효과가 적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획일적 통제 중심의 규제이기 때문이다.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는지에 맞춘 거리두기가 되도록 해야 하고, 근본적으로는 거리두기 단계 자체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자율과 책임 중심으로 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단지 지금의 문제이거나 지나가면 말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국가와 사회와 우리의 시민적 역량, 민주주의의 발전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칠 방역이고 정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