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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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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현대사 푸는 중요한 공간 제시”

GOSPEL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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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57년 11월 서울 시공관(市公館)에서 3일간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의 흥망’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는 나운몽 목사.

‘용문산기도원 제4회 학술세미나’ 요약 제6회 …

박명수 박사, “애국, 개혁, 이를 영적으로 이해 해결한 영성운동이 나운몽 신앙운동의 토대”

지주계급으로 몰려 험한일을 겪을 것을 두려워한 최일성이 면피하기 위해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나운몽은 최후라고 생각했으나 여기서 또 미군의 공습으로 형무소가 파괴되면서 극적으로 탈출한다. 구사일생으로 용문산으로 돌아올수 있었으나 이번엔 ‘빨갱이’를 색출하기 위해 인민군으로 변복한 국군에게 수복지구에서 피난와 있던 사람들이 억울하게 학살당하게 되었다. 나운몽은 이들이 결코 빨갱이가 아니라고 변호해 주었고 많은 사람을 살렸다. 좌우의 갈등이 심할 때 빨갱이가 아닌것이 확실했던 기독교인의 판단이 존중받았다. 이로써 여러 지역에서 같은 사례로 수많은 양민이 살 수 있었고, 당시 한국기독교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기여한 측면이 있었다.

나운몽의 집은 좌익으로 몰려 도망다니는 사람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나운몽 자신을 인민군이라고 고발한 최일성이었다. 국군은 용문산에 숨어든 최일성을 찾았으나 나운몽은 그를 살려주었다. 그가 전쟁터에서 죽을 목숨을 살려 준 것은 한둘이 아니었다. 수많은 피란민들이 용문산으로 몰려왔고, 나운몽은 국군과 경찰 앞에서 이들의 신원을 보증해 주었다. 그가 이들의 신원을 알고 보증해 준 것은 아니었다. 당시 무고한 사람들이 제대로 제판도 없이 죽어갔으므로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그들을 살려 준 것이었다. 이렇게 살아난 사람들 중에는 윤씨 성의 청년이 있었는데 인민군 치하에서 공산주의 청년위원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애향숙은 지역사회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이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정신적 현실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나운몽은 일본사람들이 사용하던 금광교를 인수하여 교회를 시작했다. 수복 후 미국 CIC가 사용했으나 나운몽은 이를 다시 되찾아 교회를 시작했다. 1.4후퇴 이후에는 아천의 신사자리를 인수해 아천교회를 세웠다. 교회를 세우는 동시에 본격적인 영성운동을 발전시켰다. 1951년 1월 1.4후퇴를 보면서 복음으로 한국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으로 12명의 숙생을 모아 십자군백의전도대를 만들었다. 나운몽은 이들과 깊은 영적 체험과 철저한 전도훈련을 시켰다. 이 수련생들이 지역과 전국 방방곡곡에 대대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용문산은 새로운 영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명향식 전도사를 비롯 외지의 기도자들이 찾아왔다. 이런 새로운 영적운동은 장로교 보수주의 전통이 강한 경상도 지역의 교회와 갈등을 일으킬 상황이 되었다.

나운몽은 6.25전쟁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성령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용문산을 새로운 영적 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6.25 한국전쟁 이후 60년대에 이르기까지 용문산은 한국 기도원운동의 중심이었다.

나오는 말

본 논문은 나운몽의 초기 사역을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관련해 살펴봄으로써 한국의 일반인들이 직접 경험한 한국 현대사를 재구성해보면서 동시에 나운몽의 이후 사역의 배경을 추적하려고 하였다. 나운몽의 초기 생애를 통해 그가 6.25 전쟁 이후 한국사회에 새로운 영성운동의 특징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 특징이란 첫째,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정신, 둘째, 사회를 개혁하려는 개혁정신, 셋째, 이 모든 것은 영적으로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영성운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후 전개되는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 운동의 밑바닥에는 이 같은 나운몽이 초기부터 갖고 있는 영적인 특징이 발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실 나운몽의 초기 생애에 관한 연구’

논찬 : 박종현 박사(한국문화신학회 회장)

“나운몽, 기독교와 민족을 하나의 비전으로 재해석한 기준 제시”

역사적으로 독립 및 민족 운동은 5가지로 대별 된다. 무장항쟁인 군사적 운동, 독립정부를 위한 정치적 운동, 지역적으로 재구성한 민족사회운동, 조선어학회 같은 문화보존 운동, 민족정신을 지키려는 정신운동이 그것이다.

해방 이후엔 기독교에 가장 큰 도전이 닥쳐왔다. 파시즘과 공산주의이다. 유럽은 나치즘을 경험한 반면 공산주의는 경험하지 않았지만,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에 이어 북한 공산주의를 모두 경험했다. 따라서 한국은 20세기 현대사를 풀어내는 문제와 관련이 깊은 곳이며, 이 가운데에서 기독교만의 공간을 어떻게 풀어냈는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나운몽 목사님은 그 공간을 만드는데 굉장히 크게 기여한 분이다. 박명수 교수는 나운몽의 삶의 2줄기, 일제강점기와 해방후 한국전쟁 시기의 삶을 재조명하므로 나운몽이 본격적으로 활동이 시작되기 위한 토대를 역사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나운몽이 교회가 아닌 공동체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한국 기독교사에 굉장히 의미가 크다. 서양 사람이나 서구 신학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창의적으로 만들었다. 나운몽은 한국인의 공동체운동을 만든 분이다. 박명수 교수는 나운몽이 기독교 신앙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재구성하는 종교적 태도를 갖고 있었고 이것이 당시 한국교회의 일반적 영성과 구분된다고 보고 있다. 주체적 정신세계 안에서 기독교와 민족을 하나의 비전으로 재해석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토착화된 영성이 만든 결과를 살피는 것은 앞으로도 중요한 지점이다.

나운몽은 세례를 받고 용문산 일대의 토지를 구입한 후 도의자수회를 조직해 사회적 농업공동체와 영적 수도공동체를 겸비한 영성 공동체를 설립했다. 그러나 지역 기득권 세력인 불교 집단은 신흥 기독교 집단을 배척했고, 이는 일제와 결탁한 기독교 탄압으로 나타났다. 나운몽은 일제에 검거돼 국체명징에 근거한 사상 검증을 받는 등 고난을 치르게 되었고 그 결과 1943년 만주로 피신하게 된다. 3년간의 피신 생활 끝에 부친상의 소식을 접한 그는 1945년 2월 귀국하였고 일제는 파국을 맞았고 해방 정국에서 그는 일제의 잔재인 신사를 파괴하는 작업에 주력했다.

해방 후는 나운몽의 기독교 공동체가 심화 완성되는 단계이다. 남감리교가 협동조합운동을 벌였으나 사회운동 자체에 멎어진 반면, 나운몽은 그를 넘어서서 근본적인 것, 영성인 것을 지향했다. 이 부분이 굉장히 창의적이다. 해방 후 나운몽은 기독교 농민 언론 사업을 추진하는 등 기독교적 사회참여를 하지만 정치 문제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기독교 사회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지향하지 않고 애향숙이라는 기독교적 영성 공동체 방향으로 나갔다. 그가 1930년대부터 진행해 오던 기독교사회운동을 사회적 영성 공동체로 승화시킨 중요한 도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장로교의 예수촌 운동에 비견되나 예수촌 운동이 이념과 교리의 갈등으로 가진 한계를 영성으로 극복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보인다.

한국전쟁은 한국 근대사의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의 시대였다. 나운몽은 남한의 민주체제가 북한의 독제체제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았다. 정치단체에서 부위원장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그는 정확히 거절했다. 이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애국자들이 갈라져 싸우는 것을 목도했던 그는 좌우를 떠나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찾았고, 기독교와 기독교적 영성을 더 깊이 견지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분열에서 한 걸음 벗어나 우익이든 좌익이든 인간의 생명을 먼저 구하는 일에 앞장서는 차원 높은 휴머니즘을 그의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 구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