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기도원 한민족 유월절 대성회 야외집회 광경(사진 좌). /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처, 용문산기도원 구국제단(1963년 설립 때 모습과 현재 모습.)
기도원이 제 기능으로 역할하도록 보장돼야 …
성령이 함께 할 때 하나님 역사하시는 한국교회 될 것 (고전 2:4, 5, 요 14:26)
기도원의 고유 기능인 신앙쇄신과 영성회복에 전념하기 위해 기도원은 교회와 다른 물리적 조건을 갖추는 것이 필요했다. 복잡한 도시 지역을 떠나 조용한 산속에 자리잡았다. 세속적 유혹을 멀리 하는 만큼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성경적 해답이었고, 이를 실현하는 물리적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이로써 기도원은 세속의 끈을 끊고 오직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신앙 수련과 기도처가 됐다.
이 같은 새로운 환경에선 실내 공간도, 야외의 자연과 넓은 터도 리프레쉬를 위한 장소였다. 즉 기도원만의 역할을 위한 새로운 장소와 분위기는 원내 특정 장소가 아닌 기도원 경내 전체가 담당했다. 주일이든 평일이든 기도원의 일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산에 자리잡은 처음부터 설립 목적이 기도원이므로 1년 365일 모든 날이 기도원의 기능 수행을 위한 날일 뿐이지 무슨 요일은 기도원, 무슨 요일은 교회가 담당한다는 식으로 나눌 수가 없다. 그런데 기도원을 기도원과 교회로 나누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한국 굴지의 교단이 벌이고 있다. 기도원에 교회 행정 마인드를 들이댄 것이다.
기도원의 모든 일정과 시설은 기도원의 기능을 100% 다하기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한 예로 초기의 용문산기도원 내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교단의 교회를 두었었다. 이는 각 교파 교인들이 용문산기도원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각 교파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각 교파 담임목사를 세우고 교인들이 자기 방식으로 주일예배를 볼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따라서 각 교회는 기도원 내의 한 시설이었을 뿐 기도원을 운영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각 교파를 존중하는 용문산기도원의 전도 정신과 운영 철학을 십분 발휘하고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80여 년의 용문산기도원의 긴 역사에서 기도원이 아닌 적이 없었던 것은 기도원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다하기 위한 운영과 그 정신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용문산기도원은 이를 지키기 위해 기성 교단에 들어갈 때 기존 운영 방식과 운영 주체를 보장하는 약정을 맺었다. 그러나 기성 교단은 이 약정을 어기고 교회의 날, 기도원의 날로 기도원 운영 자체를 분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가령 주일, 수요일, 구역예배는 교회, 나머지 평일은 기도원이 담당하게 한다는 식이다. 이 같은 발상 자체가 한국교회 역사에 없는 초유의 발상이다. 이는 기도원의 운영권을 빼앗기 위한 편법적인 방법으로 의심받을 수 있지만, 더 심각한 것은 명백하게 기도원의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시도라는 점이다.
더욱이 용문산기도원은 한국교회 부흥의 진원지로서 역할한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기도원이다. “용문산은 수많은 전도자를 배출, 한국교회 부흥의 한 진원지가 됐다”(1992. 기독교대백과사전, 기독교문사) 이 같은 비중 있는 용문산기도원을 접수한 기성 교단의 책임은 막중하다 할 것이다. 그동안 평가받지 못한 부분을 찾아내서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역할로 자리매김하고, 한국교회에 쇠퇴해가는 영성운동의 상징으로서 십분 활용해 교회 부흥을 위해 전념해야 할 마당에 오히려 거꾸로 기도원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에서 신앙혁신과 영성회복의 고유한 역할을 담당했던 기도원의 존재와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 기독교의 크나큰 손실이며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퇴행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적으로도 옳은 방향이 아니다.
한국의 기도원이 성령운동을 대변하며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발전해온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용문산 기도원을 시작으로 한국 기독교의 기도원 수는 급격히 증가한다. 용문산기도원은 전국 70곳의 산지에 기도원 분원을 설립했고, 각 교파 목회자들도 기도원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한국 기독교는 수레의 두 바퀴처럼 교회는 지역사회의 신앙 공동체로서, 기도원은 신앙쇄신과 영성회복의 처소로서 상호 보완하며 발전했다. 특히 기도원은 교회가 담당하지 못했던 신앙쇄신과 영성회복을 통해, 서영석 교수의 지적 대로 당시 한국교회의 성령부재 현상의 부작용을 만회하며 결국 교회를 새롭게 일으키는 보완적 기능을 수행했다. 기도원이 한국교회에 혁신적인 순기능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것은 기도원이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서 성령 운동의 진원지로 역할하므로 가능했다. 기독교는 성령 강림에 의해 탄생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 5)” 탄생 뿐 아니라 성장도 성령이 있어서 가능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복음이 세계에 전파될 수도, 기독교가 세계 제1의 종교로 성장할 수도 없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기독교는 성령의 역사를 뺀 역사적 기록이나 종교적 교리나 학문적 논리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전제되지 않는 기독교는 생명 없는 박제된 기독교일 뿐이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 5).”
성령으로 인해 기독교는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현실 속에 나타내 보이시고 섭리하시며, 인간과 삶과 사회와 역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종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성령과 기독교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특히 세계 유례 없는 한국교회 성장에 있어 성령의 역사를 부정할 수 없다. 한국교회가 미래를 생각한다면 인간의 생각을 뒤로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다시 성령운동의 정통의 맥을 이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지금의 어려움을 겪는 것은 자신의 성장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려 하지 않고, 자신을 성장시킨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다보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 크다. 한국교회가 기적적 성장의 열매를 얻는데 있어 성령운동의 진원지인 기도원과 기도원운동은 그 뿌리로서 역할했다. 한국교회는 열매를 향유하고 과실을 따 먹으면서 그 뿌리가 된 기도원의 역할을 인정하거나 성과를 나누는 일을 간과했다.
한국교회는 최소한 역사 앞에 당당해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자신을 성장시킨 성령운동의 본질을 연구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성령운동을 이끈 기도원운동은 “날 보내소서”하는 구국적 사명과 한국복음화를 위한 희생의 이타적 신앙을 강조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성령 역사의 본질임에도 성령운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보니 축복 성회처럼 이기적, 기복적 축복을 따라가는 신앙으로 변질되는 우도 범했다.
결국 해외 서구의 기독교가 쇠퇴하는 것과 같은 수순을 밟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나라보다 성령의 능력이 크게 임했던 한국교회는 달라야 한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해야 될 일이 있다면 본원을 찾는 것이다. 우리의 성장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사실대로 규명하는 일이다. 본원을 찾고 존중하고 지켜 나갈 때, 즉 진실로 성령이 함께 할 때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시는 한국교회와 우리나라가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한국교회는 최소한 역사 앞에 당당해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