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기도원 제4회 학술세미나’ 요약 제5회 …
박명수 박사, “아실 나운몽의 초기 생애에 관한 연구” 강연
아실 나운몽의 초기 생애에 관한 연구
-해방 전후와 6.25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박명수 박사(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나운몽이 한국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성령운동과 민족운동을 결합해 한국의 독특한 영성운동을 이끌었고 한국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정신이 어디에서 기인했는가를 알기 위해 그가 젊은 시절 어떤 과정으로 생각을 형성해 갔으며 기독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나운몽의 성장 배경과 기독교 입문
나운몽은 어려서 한문을 공부했고 평북의 기독교 명문 오산보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당시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학교로서 일본어를 국어라고 가르쳤고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상당히 후퇴하고 있었다. 여기에 나운몽은 반발하여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광학교로 옮겨서 공부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민족의식에 투철한 교육을 시키고 있는 점에 만족하였다. 그가 서당교육과 보광의 영향을 많이 받아 나중에 기독교를 받아들여도 민족주의적인 측면에서 기독교를 수용하게 되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나운몽은 이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가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적을 두었다 2학년 시에 중퇴하고 1934년 고향에 돌아와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한글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주입했으므로 일본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결국은 중단해야 했다. 나운몽은 일본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이 당시 그는 한편으로는 인생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했다. 여기에서 나운몽의 중요한 특징을 보는데 하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의 현실에 관한 문제이다. 나운몽은 일본 경찰에 쫓겨 남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해서 이북 사람 나운몽이 남한으로 오게 된 것이다.
몸의 피신과 인생에 대한 질문이 합천 해인사에 들어가 수도를 하게 했고, 이곳서 멀지 않은 용문산의 암자에 들어가게 되었다. 불교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운몽의 인생은 이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완전히 달라진다. 전적으로 기대하지 않던 곳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경험한 것이다. 이것은 어거스틴 만 아니라 이수정, 이상재 등 한국 기독교의 오랜 영성 가운데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 나운몽은 이런 한국 기독교 영성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나운몽은 결국 자신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는 한국적 전통을, 어머니로부터는 기독교적 전통을 영향받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나운몽에게 이런 부모의 상반된 신앙은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기독교신앙으로 과거의 전통을 재수용하는 것은 그가 한국종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이해하는 기본 틀이었다. 나운몽에게 있어 기독교신앙의 수용은 과거의 부정과 새로운 것의 수용이 아니라 오히려 몽학선생의 안내를 받아 참 진리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대립이 아닌 하나로 융화되는 것은 나운몽의 중요한 특징이다.
2. 나운몽의 용문산 초기 생활과 만주 피란생활
이렇게 그의 신앙생활이 시작됐다. 곧바로 용문산에서 10리길에 있는 능청교회(장로교)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조선출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영수로 임직되었다. 사실 나운몽의 초기 신앙생활은 김천지역의 장로교를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나운몽은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인 다음에 이곳에 정착하기로 마음 먹고 지금의 용문산 6정보를 사들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용문산 시대가 시작되었다.
나운몽은 도의자수회를 열고 한글과 성경을 가르치며 농촌계몽운동을 지속하고 신앙부흥운동을 함께 전개했다. 이렇게 기독교공동체를 만들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장로교의 책임자급이던 송창근 목사의 신원보증으로 1943년 풀려난 나운몽은 일경을 피해 만주로 망명을 갔다. 나운몽은 1945년 2월 해방의 서광을 예감하고 다시 용문산으로 돌아왔다.
3. 해방정국과 나운몽의 건국활동
마침내 8월 16일 해방 소식을 들은 나운몽은 40리 떨어진 김천으로 달려나가 주민들을 이끌고 신사를 파괴했다. 신사참배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기독교 신앙의 발로였다.
일본 종교는 갔지만 해방 정국에서 공산주의는 우익인 기독교와 새로운 갈등 요소로 등장하고 있었다. 다음날 나운몽은 서울로 올라와 각종 정치단체를 섭렵하면서 당시의 정치지형을 알게 되었고, 적산이던 일본인이 운영하던 연성지우라는 잡지사를 인수해 농민성보를 창간했다. 이승만박사의 제호, 김구, 김규식 같은 임정 인사들과 목사, 농민의 글을 실으며 문서선교와 농민잡지를 겸하였다.
나운몽은 당시 우익 청년운동단체인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에서 “이 민족이 하나님에게 돌아와야 한다”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받았고, 위원장 최규항이 부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나운몽은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고 제의를 거부하였다. 당시 영성을 강조하던 나운몽은 수표교교회에 다니면서 새벽기도를 쉬지 않았고 1946년 3월에 장로가 되었다. 이때부터 나운몽은 감리교 신자가 되었고, 과거의 습관과 철저히 단절하고 기독교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또한 나운몽은 기독교의 요청으로 기독공보 운영을 맡았고, 한국기독교연합회와 교계의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교회의 중요한 과제는 일제 강점기 친일행적을 조사하는 일이었는데 나운몽은 조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신문에 공표하는 책임도 가졌다.
그는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의 부위원장을 거부한것처럼 이 일도 거부하고 1947년 다시 용문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기독공보는 영락교회를 거쳐 장로교 기관지가 되었다.
4. 6.25 한국전쟁과 나운몽의 시련
오랜동안 산중에서 깊은 영성을 추구했고 순박한 농민들과 이상적인 공동체를 꿈꾸었던 나운몽은 서울의 정치에 환멸을 느꼈고 용문산으로 돌아와 신앙공동체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와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대환영이었다. 이것이 애향숙운동이다. 수도사들을 모아 깊은 훈련을 하는 수도원,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일, 고등공민학교를 세워서 청소년을 교육하는 일, 새로운 농작물을 심어 농촌을 개량하는 일들을 함께 추진하였다.
나운몽은 이렇게 주변 지역에 학교와 교회를 많이 세우게 되었고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애향숙이 자리를 잡아가던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나운몽은 피난길에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하나님의 은혜로 구사일생을 경험한다.
나운몽은 용문산에서 찬송소리가 나야 한다고 결심하고 전쟁 중에 다시 용문산으로 돌아온다. 돌아온지 얼마 안되서 그는 인민군에게 잡혀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