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월 23일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지난 9월 1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합의한 ‘평양공동선언’과 ‘판문점 선언 이행’(사진 우)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 비준안을 심의·의결했다.(사진 좌)
아직 위험 그대로인 때 한국이 중심 잃지 말아야 …
어렵고 힘들 때 일수록 하나님 찾아야 (신 31:8)
문 대통령의 구상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북한의 비핵화 성과를 외교적 업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만큼 중간선거를 북미협상을 추동하는 동력이 되게 하고자 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중재결과를 바탕으로 판을 깔아주고, 미국 측이 선거를 의식해 북미협상을 진전시키고, 클라이맥스가 될 김 위원장의 서울답방을 계기로 남·북·미가 연말쯤 ‘종전선언’까지 이를 수 있다는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하다 보니 부작용이 뒤따르고 있다. 북한이 비핵화 실무협상은 최소화하면서 정치적 타협을 하려는 상황에서 자칫 한국 정부가 북한·중국·러시아와 같은 편에 서서 미국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됐다. 한미의 입장차 노견이 확대되고 한국이 합세한 대북제재 해제 압박 요구가 거세지면서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오히려 한 발 빼는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미국과 입장 차가 불거지는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는 정부대로 남북경협에 속도를 내고 대북제재 해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3일 9·19 평양공동선언과 남북 군사 분야 합의서를 국회 동의 절차를 갖지 않고 전격 비준했다. 남북관계 개선·발전으로 중재력을 키워 북한 측에는 영변 핵시설 폐기 등 실질적 비핵화를, 미국 측으로부터는 단계적인 대북제재 완화 입장을 유도하겠다는 의도이다. 또한 남북 관계의 조속한 진전을 통해 비핵화와 미·북 관계 개선을 이끌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비준 날 문 대통령은 “남북관계 발전과 군사적 긴장 완화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더욱 쉽게 만들어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비준 이유를 밝혔다.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겠다’는 의지를 실행한 셈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북한은 북한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세 나라가 제각각의 행보에 나서고 있는 심히 우려스러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북한의 진정성 있는 비핵화가 이뤄질지, 미국이 끝까지 북한의 비핵화 프로세스를 담보할지, 한국이 북한 비핵화의 촉진제 역할을 할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불확실한 안개 정국이 오래 가면 대처를 못하므로 갑작스런 위기가 오고야 만다. 이같은 상황이 확대되기 전에 이제는 한국이 냉철해져야 한다. 오직 힘의 질서와 자국 이익, 명분만 있는 국제사회는 더욱 모든 것이 내 필요대로 일방적일 수 없다.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도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한반도가 대변혁기에 놓여 있고 주변국이 자국 이익 극대화를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엄중한 시대적 상황일수록 우리가 중심을 잃지 않고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가야 한다.
우리는 누구보다 절실하게 한반도 비핵화와 통일국가의 꿈을 실현해야 한다. 이러한 때일수록 예측 못할 위기와 난관을 헤쳐가기 위해 분명한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이 시대적 파고를 넘을 원칙이 무엇일까.
첫째, 한미동맹과 국제사회 공조의 틀이 깨져선 안 된다. 일찍이 북한이 일으킨 6.25 적화통일 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을 중심한 국제사회가 함께 쏟은 피의 희생 때문이었다. 세계 국가가 함께 지킨 자유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한국이 지금처럼 세계적 경제강국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이다. 북한이 핵으로 무장하고 미국과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위기를 극복하는 힘도 이 틀에서 나온다.
아직 핵을 포기하지 않은 북한은 지금도 우리의 적일 수밖에 없다. 평화 무드에 취해 너무 성급하게 스스로 자위력을 약화시켜선 안 된다. 사실 북한이 선제적 비핵화 조치라고 선전하는 풍계리 핵 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발사대 폐기는 모두 실험 시설이지 양산용 시설이 아니다. 이미 핵개발을 완료한 북한으로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시설이다. 더 나아가 북한이 대북제재 해제를 저울질하는 영변 핵 시설을 폐기한다고 해도 비핵화의 첫 출발점인 핵 동결과는 무관하다.
북한의 핵 인프라는 지금도 동결 없이 가동 중이다. 핵폭탄 원료를 생산하는 양산용 주력 시설은 이미 영변에서 옮겼다. 올 4월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도 북한은 6~7개의 핵탄두를 추가 생산했을 것이라고 미 정보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실제가 바뀌지 않았는데 아무리 연일 평화를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역사는 평화협정이 오히려 전쟁의 도화선이 됐음을 증거하고 있다.
1938년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이 국민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독일의 히틀러와 뮌헨에서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이듬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독일과 소련은 1939년 그 유명한 ‘뮌헨 협정’으로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3년 후 독일은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했다. 1973년 미국과 북베트남은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2년 후 북베트남은 미국이 철수한 남베트남을 공격해 공산통일을 이뤘다. 1990년 통일에 서명한 남예맨과 북예맨은 1994년 무력 재통일의 1차 내전과 2012년 2차 내전을 겪으며 지금까지 21세기 최악의 비극적 사태를 맞고 있다.
평화는 무력이 균형을 이룰 때, 서로 상대방을 두려워할 때만 가능하다. 더욱이 핵위협을 바로 머리맡에 이고 과거 미·소 냉전 때보다 더 위험한 신냉전의 한복판에 처해 있는 한반도의 ‘평화’는 결코 낭만적일 수 없다.
현실을 바로 보자. 지금까지 북한이 개발한 60여발의 핵탄두와 1000여 발에 달하는 각종 탄도미사일, 매년 12개 정도의 핵탄두를 생산하는 인프라 등 북한의 기존 핵전력은 아직 그대로이다. 생화학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와 북한이 주력해 키운 전자전 전력에는 아예 무방비이다. 우리 한국의 5000만 국민의 삶을 졸지에 빼았을 수 있는 위협이 코앞에 상존하고 있다. 이런 위협을 그대로 가진 채로 북한은 핵을 거래 수단으로 삼아 한·미 연합훈련 중단에 이어, 종전선언, 유엔사령부 해체, 주한미군 철수 그리고 한·미 동맹 해체를 꿈꾸고 있다.
지금 북한은 비핵화 단계별 보상, 즉 상응조치를 요구하며 그것을 실제로 하나하나 현실화하고 있다. 심히 우려스럽다. 과거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나서는 척하면서 뒤로 핵개발을 완성하기까지 국제사회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을 다시 똑같이 반복할 수 있다. 다시는 북한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겠다며 ‘CVID’의 완전한 불가역적 비핵화 원칙과 ‘선 비핵화, 후 제재완화’란 협상 원칙을 정하고도 또다시 이런 저런 이유로 무너져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어렵사리 마련한 대북제재를 위한 국제사회의 공조의 틀을 지켜야 한다.
문 대통령이 9월 25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을 하더라도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고 설령 제재 완화를 하더라도 북한이 약속을 어기면 제재를 다시 강화하면 그만이다”고 했지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완전한 비핵화 전 평화협정 체결은 두 가지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북한의 핵 보유를 결국 인정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고, 둘째는 유사시 유엔연합군의 참전을 가능하게 할 유엔사령부를 한반도에서 해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또한 대북 제재완화도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번 제재완화를 하고 나면 다시 재 제재를 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도 대북제재 완화를 주장하는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현실에서 재 제재를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자칫 평화무드에 취해 안보를 늦추거나 어렵게 마련한 국제공조의 틀에 금이 가게 해선 안 된다.
또한 휴전 이후 65년간 전쟁을 방지해 온 한미동맹에 금이 가선 안 된다. 다만 찰떡 공조 속에 한국과 미국이 역할을 잘 분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엄한 경찰로서 북한이 실질적인 비핵화를 하도록 압박하는 대신 한국은 이를 근거로 북한이 실질적인 비핵화를 진전시키면 남북 경협 등으로 호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계속 설득해야 한다. 즉 압박과 유인책을 동시에 견지하므로 북한이 좋은 선택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둘째, 북핵 동결이 아닌 포기를 위해 냉철한 이성으로 대응해야 한다. 국제사회의 냉엄하고 이기적인 생리에 잘못 휘둘리면 북한 비핵화가 물 건너 갈 수 있다. 우리가 북한과 관계 개선에 모든 공을 들이고 있지만 우리에게 조심해야 할 대상은 북한만이 아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고는 철저히 ‘아메리카 퍼스트’, 즉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한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16년 4월 선거유세에서 “북한이 한국이나 일본과 전쟁을 벌인다면 그들(한국과 일본)이 하는 것이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미군을 동원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스스로 지키도록 하겠다”고 공언하며 “행운을 빈다. 당신들 잘해보라”고 조롱하며 남의 나라를 왜 챙기냐고 했던 사람이다.
또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미국은 단지 우방이기 때문에 한국을 도와 북한 비핵화에 나서는 것이 아니다. 동북아는 중국이라는 가장 막강한 견제세력이 버티고 있는 핵심적인 전략지역으로서 미국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한반도 평화협정이 이뤄지면 사실상 미국이 지배하는 유엔사는 한국 내는 물론 7개의 일본 후방기지를 운영하는 지위를 잃을 수 있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서 자국 이기주의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김정은은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앞으로 협상 과정에서 미국만 설득할 수 있다면 핵 폐기가 아닌 핵동결로 비핵화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하고도 중요한 문제이다. 일례로 트럼프는 첫 북미정상회담 전까지 “결실이 없으면 회담장을 나올 것”이라며 북한을 아주 강하게 압박했지만 실상 회담 결과물은 실망 수준이었다. 트럼프는 사업가 때부터 협상 전에 기대 수준 이상의 조건들을 제시해 얻을 것을 얻고 그 이하 수준에서 마무리하는 협상전략을 구사해왔다. 트럼프는 자서전 ‘협상의 기술(1989)’에서도 밝혔듯이 공개적으론 ‘최대치 입장’을 취하되, 실제론 그 이하 수준에서 자기가 얻을 것을 얻고 ‘타협’하는 협상가이다. 이같은 트럼프의 존재는 김정은에게 일생일대의 기회이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이 원하는 수준, 즉 핵무기가 미국을 겨냥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하고 기존 핵전력을 미국에 묵인 받는 정치적 타협을 추진할 것이다.
실제로 북한의 5차 핵실험(2016.9.9) 이후부터 미국의 조야에선 북핵 동결에 대한 주장이 제기됐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2016.10) 당시 미국의 16개 정보기관들을 총괄하고 있던 국가정보국(DNI) 클래퍼 전 국장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미국의 정책은 사실상 실패”했다고 진단하고, 북핵 포기 대신에 “핵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해 미국의 ‘북핵 보유 인정과 핵동결 해법’ 논란을 일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