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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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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나운몽 목사 학술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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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운동 초기에 “근거 없이 이단으로 규정” 밝혀 …

성령운동의 본질 현재에 접목 계기돼야 (고전 2:14)

오늘날 한국교회의 심각한 정체현상에 대해 위기의식이 커지면서 어느 때보다 자성과 혁신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교계 안에서 불미스런 일이 계속되면서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게 아니냐는 회의마저 생기는 현실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영성회복’과 자국에서 나온 ‘자신학’에 대한 요구이다. 그동안 성장을 당연하게 알아왔던 한국교회가 대안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기독교가 빠르게 성장한 나라이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에 불어온 교회의 부흥은 놀라웠다. 정부 통계에 의하면 1960년에 한국교회 교인 수는 62만 명(전체 국민의 2.48%)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995년엔 875만 명이 됐다. 불과 30여년 만에 무려 14배나 폭발적으로 성장해, 국민 5명 중 1명이 기독교인(1995년, 국민의 19.4%)일 만큼 어엿한 기독교 강국으로서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 전파가 이뤄진 근세의 세계 선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고, 우연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성장에 취하고 풍족함에 젖은 채, 왜 이같은 기적적인 성장이 있었는지에 대해 잊었고 탐구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부흥기의 초심을 잃어버린 이유이자 오늘의 위기를 부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부흥의 역사와 단절된 채 성장의 과실만 맛봤던 것이 한국교회의 가장 큰 패착이었다.

왜 이같은 일이 생긴 것일까. 요즘은 한국교회의 위기의식이 기반이 되 영성회복운동이 많이 강조되고 있지만 말로만 막연히 “영성 회복하자”고 해서 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영성’이란 ‘성화’와는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어떻게 영성을 회복할 수 있는지, 그저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되는 것인지 착각할 만큼 막연하다.

영성회복운동을 예전 용어로 말하면 ‘성령운동’이다. 부흥의 기적이란 초대교회 성령의 역사가 말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50·60년대에 전국에 불어닥친 성령운동이 기적적인 한국교회 부흥의 주요한 원인자가 됐다. 이 이후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교회 신자 수 증가율이 매년 20~40%씩 전무후무한 성장을 지속한 것을 보면 성령운동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당시 성령운동의 대표 주자는 ‘나운몽 장로’(1979년 목사 안수)였다. “용문산은 수많은 전도자를 배출, 한국교회 부흥의 한 진원지가 됐다”(1992. 기독교대백과사전, 기독교문사)

그는 평신도의 신분이었고, 당연히 교권과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최거덕 목사(예장 증경총회장)가 “그가 교계 정치에 뛰어들었다면 대단한 성공을 거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온 정력을 쏟은 것은 전도와 전도자 배출밖에 없었다”고 평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대로 순수하게 전도운동을 한 것이지 교세 확장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권의 이해는 달랐다.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이단으로 정죄되는 단초가 되었다.

교권은 그의 집회 참석을 막기 위해 근거 없이 이단으로 몰았고, 이로 인해 그가 한국교회에 일으켰던 성령운동도 변방에 밀린 채 폄훼되거나 온갖 오해를 낳는 원인이 됐다. 이것의 중대한 과오는 한국교회 부흥의 중요한 원인과 역사를 규명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이며, 이와 함께 마치 불모지에 하루아침에 빌딩이 세워진 것처럼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성을 소거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같은 차원에서 볼 때 지난달 15일 감리교 삼남연회 본부(부산)에서 용문산운동에 대한 첫번째 학술적 조명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나운몽(장로)과 용문산 기도원’ 주제의 학술세미나가 개최된 것은 자못 의미가 컸다. 특히 ‘나운몽 장로에 대한 이단 정죄가 일부 교권에 의해 근거 없이 이뤄졌다’는 규명이 한국교회 주류 사학자와 신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뜻깊었다. 또한 기존의 전통 신학에서 볼 수 없던 나운몽 장로가 추구했던 ‘자신학’에 대한 첫 고찰이 이뤄지고, 그가 일으킨 용문산 운동의 성격을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장이 마련되므로써 한걸음 진전한 학술세미나가 됐다.

물론 나운몽 장로가 차지하는 한국의 기도원운동, 한국복음화운동, 구국기도운동의 시발자로서의 조명이나, 500여 교회를 설립하고, 70여권의 저서를 남기는 등 정열적인 전도 인생을 통해 이룩한 역사적, 신학적 성과에 대한 더 많은 연구를 뜻있는 후학들에게 기대해야 할 것이다.

이번 학술세미나는 이같은 동기와 필요를 제기하는 첫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본 란은 이 날 발표된 논문의 요지를 몇 가지 이슈를 중심으로 두 주에 걸쳐 간략히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특히 오늘날 교회의 위기의식이 커가는 때에 한국교회 부흥의 진정한 원인과 해법을 탐구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나운몽 종교운동의 이단문제(김흥수 목원대 교수) : 나운몽을 처음 이단시 한 것은 1954년 예장 경북노회였다. 당시 조사위원회의 보고문에 의하면, ‘수련방법이 비성서적이고, 수련생들에게 배지를 달게 한다는 것, 나운몽의 본처가 북한에 있다’는 것이었다. 수련방법을 문제 삼았으나 그것이 왜 비성서적인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1955년 예장 40회 총회는 경북노회의 조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 신분과 거취가 분명하지 않고 신앙의 기초를 정신수련 위에 두며 우리 장로교 신경에 맞지 않는 점이 많음”으로 막는 것이 가한 줄 안다고 결의했다. 1956년 41회 총회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교인들의 참석을 금지키로 다시 확인했다. 단, 박태선은 이단으로, 나운몽은 경북노회의 조사에 근거하여 변태성 신앙운동자로 규정했다. 성결교도 장로교가 결정한 대로 1956년 제11회 총회에서 비성서적인 집회를 이단 사설로 규정했다. 감리교는 1962년에 처음으로 감리사회 모임에서 나운몽을 강사로 초빙할 때는 그 지방 감리사의 승인을 받도록 제한했다. 그러나 이단 징계위원회가 아니었다는 것은 감리교가 나운몽을 이단으로 보지 않았음을 말한다. 1976년 감리교 김창희 감독과 감리사 등은 “감리교 안에는 감리사회라는 것이 없고 이런 결의도 있을 수 없다”며 62년 감리사회 결의의 합법성을 문제삼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후에 나운몽이 오성교단을 창립하고 목사안수를 받게 되자 감리교 출신의 이호빈, 송흥국, 조윤승 목사는 안수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교파 차원에서 처음으로 나운몽의 설교 내용을 이단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은 1968년 예장(고신) 경남노회였다. 발단은 노회원 정태석 목사가 나운몽을 초빙하여 부흥집회한 것을 문제 삼아 그해 9월 17일 면직처리한 것이었다. 정태석이 이에 항의하여 총회에 상소하자 전권위원회는 이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나운몽을 이단으로 정’하되, 정태석이 나운몽집단을 추종 변호 협조하지 않을 것을 명백히 하면 형량을 감량하고 적기에 복직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이때 경남노회는 정태석 문제를 다루면서 나운몽의 신학사상을 확인하기 위해 1963년 간행된 ‘나운몽장로 구국설교집 5집’의 “진리는 결박되지 않는다”는 제목의 설교를 분석하고, 석가나 공자를 동방의 선지자라고 했다는 점 등을 문제 삼아 이단적 발언으로 규정했다. 나운몽이 신학적인 문제로 이단 판결을 받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나운몽은 제기된 모든 조항에 대해 반박했다.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도 선지자라 했고, 이방의 발람도 선지자라 했는데 유대땅에서 출생한 사람에 한해서만 선지자라 하는 법은 없다고 반박했다. 당시 이문제에 대해 의견을 낸 이는 연새대의 구약교수 김찬국이었다. 김찬국은 영국의 구약학자 로울리의 Prophecy and Religion in Ancient China and Israel(1956)을 예로 들었다. 이 책에서 로울리는 공자, 맹자, 묵자를 이스라엘 예언자와 같이 비길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연구를 토대로 해서 볼 때 공자와 석가가 이방 예언자라고 한 나운몽의 주장을 긍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불교와 유교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나운몽은 그같은 얘기는 설교문 가운데 한마디도 없고 오히려 불교나 유교를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은 있다고 답하였다. 나운몽은 공자의 도덕이나 석가의 자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교훈은 생명의 도(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에까지 인도하는 몽학선생을 담당한 것뿐이라고 답변하였다. 한국교회의 초기 선교사들 중에는 나운몽과 마찬가지로 한국종교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기독교 안에 수용 발전시키므로써 한국인들에게 적합한 기독교를 전달해 주려고 노력한 이들이 있었다.

헐버트는 한국인들에게 고유한 하나님 개념은 유일신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기독교의 여호와의 개념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언더우드는 유교가 강조하는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윤리는 기독교 윤리를 진지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주는 몽학선생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나운몽과 같은 말을 했는데 나운몽이 이단이면 언더우드, 헐버트, 존스 같은 개신교 선교사들도 모두 이단이 돼야 한다.

1950년대와 60년대 장로교와 성결교가 교단 차원에서 나운몽의 종교운동을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 1970년대부터 총신대 강사 박영관 등 신학교 교수들과 기독신보 등 기독교신문 기자들이 가담하면서 비난이 거세지자 기드온신학교 출신 동문들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좌시하지 않겠다”는 성명서를 내고, 용문산기도원측은 박영관과 기독신보 발행인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피소인들이 1954년 예장 경북노회의 보고문을 작성했던 김삼대 목사에게 증언을 요구하자 김삼대는 1977년 5월 크리스챤신문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김삼대는 6명의 피소인들이 “유일한 증인”이라 하여 자신에게 증언을 요구했다면서 ‘문제의 보고문’에 관한 해명을 전국 교회에 해명하였다. 김삼대의 성명서는 “용문산 수련회에 참석해 설교를 3회나 메모했으나 잘못된 점을 전혀 발견치 못했다. 그러나 교통이 매우 불편한 용문산 골짝까지 수천의 성도가 운집하는 것을 보아 장차 나운몽 장로가 교파를 만든다면 장로교는 물론 기성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동요되어 교회분열을 초래할 것을 염려했다”면서, “그 많은 신흥종교 그룹이 모두 무너지고 통일교파와 전도관파는 기성교회와 유대가 전혀 없지만 나운몽 장로는 건전하게 선교하여 한국교회 부흥에 크게 이바지함은 물론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금일에 이르렀으니, 그러한 나운몽 장로를 25년 전 교파를 만들지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본인이 정체도 모르는 동향인(?)이라는 말만 듣고 그 보고문을 내고 특히 그 보고 문제로 25년이 지난 금일에까지 시비가 되었다하니 진실로 유감이 아닐수 없어 그 경위를 해명한다”고 했다.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 주 후 나운몽을 찾아온 김삼대는 이용도 목사 등 신령파 운동을 이단시했던 김인서 목사를 찾아가 조사보고서 문제를 상의했는데, 그가 김삼대와 나운몽이 일문일답을 한 것처럼 허위로 꾸며서 보고서를 작성해주었다는 사실을 실토하였다. 사실로 확정할 수 없는 증언을 근거로 나운몽을 변태성 신앙운동자로 규정한 1955년 예장 총회의 결정은 근거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장로교가 나운몽의 타종교 이해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때 선교사들 및 한국종교 이해를 잘 알고 있던 감리교 신학자들이 침묵을 지킨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