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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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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성장 견인차 기도원 평가돼야

한국교회 성장 견인차 기도원 평가돼야 관련 기존 복음신문 사진
기존 복음신문 「한국교회 성장 견인차 기도원 평가돼야」 기사 사진 · 사진 복음신문 제공 · 복음신문 보유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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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축성된 용문산대성전(사진 좌상) / 2000년 초기까지의 대성전(사진 좌하) / 현재 용문산 대성전 모습(사진 우측).

어쩌다 한국 교회가 이 지경까지 왔나 …

사람의 모든 죄는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거역하거나 모독하는 자, 사하심 받을 수 없어 (막 3:28,29, 마 12:31,32)

한국기독교의 성장은 한국전쟁 이후 괄목하게 이루어졌다. 정부 통계에 의하면 1960년에 한국교회 교인 수는 62만 명이었다. 전체 국민의 2.48%에 불과했다. 한국갤럽의 ‘한국인의 종교’ 조사에 의하면 1989년 개신교인 인구 비율은 19%, 교인 수 806.5만 명으로 집계됐다. 한국교회는 30년도 채 안 되서 1300%가 성장했고, 국민 50명 중 1명이던 기독교인이 국민 5명 중 1명인 기독교 강국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5년이다. 미국의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에 의해 같은 해 한국 땅에 처음 복음이 전해졌다. 선교사에 의하지 않고 한국인 스스로 복음을 처음 이 땅에 받아들인 역사는 2년 더 앞선다. 황해도 출신 서상륜이 중국에서 영국 장로교 존 로스 선교사와 성경의 한국어 번역 작업을 같이한 뒤 한국어 성경을 가지고 고향에 돌어와 첫 예배를 드린 것이 1883년이다. 1985년을 기점으로 쳐도 1960년까지 한국기독교인 수가 전체 국민의 2.48%로 성장하는데 75년이 걸렸다. 그 절반도 안 되는 29년(1960년~1989년)만에 기독교인 수의 단순 비교로 1300%, 전체 국민 수 비율로 766% 이상 성장한 것은 성령 강림의 초대교회 이후 세계 기독교사에 없는 교회 성장사이다.

사람의 이해나 계산으로 한국교회의 기적적 성장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사람의 방법이나 홍보로는 이 같은 성장을 이룰 수도 없다. 사람의 힘과 생각으로 결코 달성할 수 없는 한국기독교의 성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국교회는 반드시 그 성장의 원인을 규명하고 교회사에서 공식화해야 한다. 자신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미래도 성장 동력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협성대 서영석 교수는 “195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성장하는데 그 원동력은 성령운동이었다”고 주장한다. ‘애향숙 용문산기도원과 기도원운동(2014)’ 학술논문에서다. 교회사 연구자들이 한국교회 성장의 원인을 성령운동에서 찾는 경향은 거의 정착 단계에 왔다고 볼 수 있다.

서 교수는 위 논문에서 “한국교회사를 얘기할 때 용문산기도원운동에 대한 부분이 빠져 있었던 점”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용문산기도원은 전쟁을 전후한 혼란기에 성령운동을 확산시켰다”고 밝혔다. 한국교회 성장을 이끈 것이 성령운동이고, 한국 성령운동은 기도원운동에서 비롯됐다는 정리가 가능하다. 기도원운동의 중심엔 고 나운몽 목사가 있다. 성령운동과 나운몽 목사, 기도원운동의 등식은 여러 학술논문에서도 확인된다.

전 연세대 교수 김명구 박사는 ‘아실 나운몽 신앙유형의 한국교회사적 위치’(2021) 학술논문에서 “(나운몽은) 1952년부터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에 심령부흥회를 인도하며 성령을 강조했다.(한국기독교 초기의) 성령역사가 죽어가다가 나운몽에 의해 전국적으로 퍼져가게 되었다.”면서 “용문산 기도원운동은 성령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고 밝혔다.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박명수 박사는 ‘아실 나운몽의 초기 생애에 관한 연구’(2021) 학술논문에서 “용문산은 새로운 영적 중심지로 부상했다.”면서 “용문산은 한국 기도원운동의 중심이었다.”고 정의한다.

일제시대이던 1940년 김천 어모면 용문산의 도치랑 마을에서 ‘애향숙운동’을 시작한 고 나운몽 목사는 해방 후인 1947년 8월 용문산기도원에서 ‘광복 2주년과 입산 7주년 기념성회’를 초교파적으로 개최하면서 한국 성령운동의 시발을 처음 알렸다. 당시 감신, 장신, 서울신, 중앙신, 한국신 등 5대 신학교장을 강사로 초빙한 최초의 초교파 산상집회가 되었다.

여기서 용문산 성령운동의 특징을 볼 수 있는데, 성령운동이 처음부터 교파를 망라한 초교파운동이었기에 전국화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교파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교파를 따지지 않고 전도의 대상화한 것이다. 또한 용문산기도원은 1952년부터 전국적 성령운동을 전개하기 전에 그 역량을 축적하기 위해 스스로를 성령운동의 전초기지로 무장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그것은 성령운동이 특정인이나 단체의 단순한 결심이나 아이디어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성령충만을 통해 전국적 성령운동의 자격과 정당성을 갖추는 필연적 과정이었다.

이렇게 용문산기도원은 일정 기간 한국교회 성장에 필연적인 성령운동의 기지로서 성장했고, 먼저 스스로의 영성이 함양됨으로써 그 성령의 권능이 외부로 방출될 수 있는 자연적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기도원으로서의 고유한 역할과 특징이 설명된다. 당시의 한국교회는 성령부재 현상이 심화되고 있을 때였다.

서영석 교수는 위 논문에서 용문산기도원의 성령운동의 배경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당시 한국교회 안에 성령부재 현상이나 기성교회의 제도적인 부조리가 나타났다. 또한 극단적이며 폐쇄성향을 가진 기성교회의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과 신앙지도의 반작용으로 기도원운동이 발생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즉 당시 교회의 정체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기도원의 새로운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동시에 기도원이 기존 교회와 구분되는 기도원만의 성격과 기능을 가지므로 발전할 수 있었음을 뜻한다.

김명구 박사는 위 학술논문에서 기도원 운동의 효시였던 나운몽의 용문산기도원을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측면에서 논증하고 있다.

김명구 박사는 “(기도원은) 선한 일꾼으로서 믿는자의 의식을 각인함으로써 시대적 요청에 응답한 형태였다. 즉 기도원은 도피성이 아닌 해방구였고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용문산 기도원을 시작으로 한얼산, 오산리, 다락방 등 각 교파로 확장돼 나갔다.”고 밝혔다.

연세대 김찬국 교수는 ‘용문산기도원운동의 진단(1970, 신학논단)’에서 나운몽의 신학이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국가구원으로까지 복음을 확장하려고 했음을 강조했다.

김찬국 교수는 나운몽의 신학이 구령의 문제와 구국의 문제를 합치하는 구조를 가졌다고 분석하고, 기독교 역사 속의 수도원 운동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용문산기도원으로 대변되는 기도원이 한국기독교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동인을 가졌고, 한국기독교의 독특한 특징으로 발전했음을 말해준다.

한국교회가 쇠락의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다시 기도원이 태동하던 때와 같은 위기를 맞았다. 성령부재 현상이 지속되면서 자신을 성장시킨 기도원의 역할을 도외시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 정치는 부패했고, 심지어 없는 권위마저 내세우며 교조적이기까지 하다. 기성 교단은 교세 위축을 애써 자위하며 주변의 역사적 자산마저 먹이로 삼아 생명 연장에 혈안돼 있다. 이는 자기 살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역사적 패착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기도원 기능의 무력화를 시도하고 교회 시스템으로 편제하는 일까지 벌이고 있다. 자신을 성장시킨 성령의 권능과 그 성령운동의 모태인 기도원에 대한 개념 정립이나 존립을 위한 법적 기반조차 한국교회에 마련돼 있지 않다. 용문산기도원이 기성 교단에 들어간 이후 해당 교단은 기도원을 교회와 기도원으로 반을 가르는 일을 벌이고 있다. 이는 한 몸을 억지로 잘라서 나누는 것과 같다. 그것은 기도원의 사망 선고와 같다. 고유한 기도원의 기능은 마비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