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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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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의 역사성 구명돼야

GOSPEL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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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 중강당에서 열렸던 학술세미나 모습.(사진 좌부터 사회자 최범선 목사/제1발제자의 논찬 이은재 교수, 제1발제자 남성현 교수/제2발제자 정시춘 교수, 제2발제자의 논찬 박해정 교수)

기독교대한감리회 재단법인 애향숙 제2회 학술세미나 …

위대한 신앙인들의 고백으로 세워진 성소 대성전

즉 참된 종교는 철저히 관계적이다. 영성이 고상한 자태를 드러내려는 한 종교는 인격적이거나 일상적일 수 없다. 기독교의 광야는 결코 도피처가 아니다. 스콜라주의가 엘리트주의로 전락하고, 신비주의가 세상과 무관한 신의 탐닉으로 간주되었던 시대를 결코 잊어선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영성이란 세계도피나 자기만족이 아니라 현실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용기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 초대교회 영성의 전공자로부터 당대 신학자들의 영성의 깊이를 풍성하게 배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소중한 논문이지만 정작 이를 통해 정당성을 찾으려 했던 아실 나운몽의 영성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일부분만 다루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적 영성의 면모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니케아적 정통주의라는 틀에 국한시키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

셋째, 아리우스 리더바이버스, 오리게네스 리더비아버스, 루터 리더바이버스와 같은 표현들처럼 이단과 정통의 과정은 역사 가운데 언제나 재해석으로 열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표자는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나운몽의 특수성이 (논문에서는 잘 안 나타났지만) 지금의 한국교회에 어떤 점에서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이에 대해 남성현 교수는 나운몽의 영성은 사회참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고 답한다. 아실의 성령운동의 모태가 된 애향숙(사랑나라건설) 운동이 일제시대에 피폐해가는 농촌의 위기를 타개하고 문맹퇴치를 위한 계몽운동으로 시작해 구국기도와 통일운동 등 고립된 개인이 아닌 공동체 운동과 구국 운동으로 나아갔다. 사회와 인류 전체를 위한 치료와 병원 활동 등을 강조했던 4~5세기 니케아 영성신학과 상당히 닮아 있다.

나운몽이 전개한 한국적 영성으로서 아실은 한민족이 제2의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역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민족을 향한 세계사적 의미와 역할을 말한 함석헌 선생의 영성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나운몽은 ‘일동일교회운동’, ‘수도원특수공동체’, 그리고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민족 구령’에 이르기까지 국가 사회 전체의 구령에 초점을 모았다. 나운몽은 유교, 불교, 심지어 정감록에 경도된 사람들에게까지 그들의 신앙심을 예수로 인도하려고 시도하는 등 민족 전체를 위한 구령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했다고 남 교수는 밝혔다. 또한 남 교수는 나운몽의 저서가 방대해 다 살펴보지는 못했다고 전제하면서, 은사론만 해도 더 많은 부분에서 밝혀야 하고, 교회, 수도원, 사회 전체로 나아가는 공동체의 치료 부분까지 다루면 더 많은 분량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제1발제를 통해 본 한국교회의 과제-편집자 주

남성현 교수가 초대교회 영성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학자로서 한국 땅에서 아실 나운몽의 영성이 초대교회의 영성신학과 만나고 있음을 최초로 발견하고, 또 이 사실을 논거로서 비교 구명한 최초의 시도를 했다는 것은 남 교수가 말한 대로 ‘니케아적 정통주의 영성신학이 말하는 성령이 역사하심을 증언해 주는 이 땅의 귀중하고 아름다운 보고’로서 아실 나운몽의 영성 연구의 주춧돌을 놓는 뜻깊은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적 영성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50, 60년대에 한국 강토를 뒤흔들고, 이 여파로 70, 80년대의 놀라운 한국교회 부흥을 견인했던 한국 성령운동에 대해 너무 등한히 했다. 한국교회의 세계 유례없는 성장의 이유를 모른 채, 아니 알 필요도 없이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의 과실을 먹고 누리는데 너무 바빴다.

심지어 개교회 성장주의의 한국교회는 성장의 공을 빼앗길까 두려워 성령운동을 신비주의로 치부하여 공을 평가절하하고 차단하기까지 했다. 이 결과, 즉 한국적 영성운동의 맥이 끊긴 결과 한국교회는 크나큰 손실을 보았다. 한국 기독교의 성장의 이면에 교파주의나 개교회주의를 벗어난 희생과 열정, 즉 사랑의 성령이 역사했음을 간과하고 그로 인해 정화와 사랑, 사회 참여적 관계성으로 꽃피웠던 한국적 영성의 맥을 잇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것은 한국적 영성과 성령운동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것이었다.

50, 60년대를 이끌었던 성령운동은 신비주의로 치부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남 교수를 통해 아실 나운몽의 영성에서 발견했듯, 성령이 주관하신 사랑의 역사로서, 시대의 전 역사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한국적 영성의 정당성을 찾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 같은 위대한 한국적 영성과 성령운동의 유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그 맥을 차단하고 몰이해하게 됨으로써 개교회주의와 이기적인 교회상으로 잘못 내몰리게 되었다. 또한 성장하려고 하나 사랑과 사회 참여적 관계성이 없어져 최근 주창되는 영성운동조차 원래의 한국적 영성의 맥을 잊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위로잔치나 성장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적 영성운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위대한 유산을 계승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의 건축적 특징과 교회건축사적 가치

정시춘 대표는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 건축은 그 시대의 신학과 실천 그리고 세상에 대한 기독교와 교회의 태도를 반영하면서 변화해 왔다고 전제하고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은 지난 60년 동안 한국 기독교의 성장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용문산기도원 운동의 물리적, 공간적 중심이었다면서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의 건축적 가치를 평가하는데 발표의 목적을 둔다고 서두를 꺼냈다.

정 대표는 초기 기독교 교회건축양식과 중세교회 건축, 그리고 종교개혁과 개신교 교회건축의 변천사를 설명한 후 19세기 미국 대각성운동 이후 복음주의 부흥운동에 영향 받은 강당형 교회건축이 출현했는데 용문산기도원 대성전 건축양식도 이 영향을 받았다고 개술했다. 특히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은 20세기 건축에서 합리성과 기능성을 추구한 모더니즘 건축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고 설명했다.

대성전의 배치는 동향으로 구약에서 성전의 배치방향과 일치한다고 밝히고 대성전의 평면은 폭16m, 길이 48.3m로 폭에 비해 길이가 매우 길어 초기교회부터 중세 고딕, 고딕 복고주의에 나타났던 3랑식 바실리카 공간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인 정동제일교회 벧엘 예배당에서 그 선례를 볼 수 있다면서 나운몽 목사의 감리교와의 관계로 보아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이 벧엘 예배당의 형식을 차용했을 것으로 정 대표는 추정했다. 또한 내부 전체 공간이 3랑식 기둥이 있지만 바실리카 교회처럼 예배공간이 세로로 3분된 느낌이 아니라 복음주의 설교 중심 교회들이 추구한 하나의 홀 예배공간의 느낌을 준다면서 구조 및 시공 기술 등의 이유로 열주들을 세웠으나 강단을 향한 시선을 방해하는 기둥들을 가능한 가늘게 만들고자 했을 것이라면서 특히 대성전은 예전이 극도로 약화된 설교 중심의 부흥회적 집회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아 그 요구는 훨씬 강했을 것으로 보았다.

대성전의 외부 형태의 특징은 합리주의, 이성주의를 표방하고 기능주의, 규범, 그리고 장식의 배제를 주창한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았다. 이는 당시 한국 교회건축의 보편적 형태와는 다른 것으로 당시 건축을 주도한 사람이 건축의 모더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더욱이 측변의 반복되는 창들은 그 입면의 비례를 잘 맞추어 단순하지만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동시에 내부에 충분한 채광과 통풍을 가능하게 해 주는 매우 기능적인 디자인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나중에 정면에 첨탑과 아치를 세운 것은 한국교회 건축이 따르던 고딕식 외형을 교회의 모습으로 생각하는 일반인들의 인식에 맞춰 성전처럼 보여주고자 고딕식을 덧붙여 논 것 같다면서 대성전 원래의 모더니즘 건축 양식과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고 첨언했다.

따라서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의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근대건축문화유산으로 보존하려면 건물이 오래돼 구조안전진단을 통해 구조적으로 취약한 부분을 보강하는 한편, 내외부 리모델링 이후 원래의 모습이 변형된 부분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정 대표는 대성전의 역사적 가치로서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한국 기독교의 부흥운동의 산실이었다는 점에서 근대건축 유산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제2발제를 통해 본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의 역사적 의미

정시춘 대표는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을 교회 건축사적 관점에서 역사적 교회 건축 양식들과 비교 분석하였다. 대성전의 건축 양식과 교회 건축사적 의의를 평가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뜻깊었다.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에 대한 건축적 특징과 교회건축사적 의의는 대성전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있어 기초적 연구로서 반드시 한번은 짚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론 정 대표의 논문이 교회건축양식의 측면에서만 비교 평가하다 보니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이 그 자체로서 갖는 의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측면은 분명 있었다. 즉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있어 교회건축양식의 측면이 아닌 대성전 건축의 필연적 동기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대성전만이 갖는 역사적 의의에 대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정 교수의 논문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더 필요한 부분으로 남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국의 문화재가 지정되고 의의를 평가받는 부분은 서양의 어떤 사례와 비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문화재 자체로서 갖는 역사적 의의가 크기 때문이다.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이 그 자체로서 갖는 역사적 의의에 대한 평가가 앞으로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대성전의 역사적 가치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흔히 교회 건축의 동기가 건축주나 교회 주관자의 비전에 의해 처음 주도되고 세워지는 것과 달리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은 성도들에 의해 떠밀려서 건축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성령운동이 시작되던 1950년대에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용문산기도원으로 밀려들었다. 지금의 대성전은 생각지도 못하던 때 당시 있던 건물들이 너무 협소해 임시 가건물이나 천막을 이용해 집회처를 만들었지만 이것도 날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성도들의 집회처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다 야산을 깎아 축대를 쌓고 계단식의 야산 집회처를 만들어서 야외에서 집회를 드려야 했다. 성도들은 장소와 상관없이 오롯이 성령과 은혜만을 사모하면서 기도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는 잘 계획되고 멋지게 세워진 교회 건물에 한정되지 않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용문산 수련회가 1년 사시사철 열리면서 한파나 더위 속에서도 집회를 계속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집회처에 대한 요구가 계속 커지면서 1959년 6월 25일 드디어 대성전 기공에 들어갔다. 이렇게 지어진 대성전은 저명한 교회 건축가의 설계나 건축에 필요한 각 분야 기술자들이 동원된 건축물이 아니었다.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산속의 돌을 머리에 이고 나르면서 대성전 축성에 나섰다.

주를 위해 헌신을 각오한 용문산 기드온성경학교 남녀 학생들이 성전의 오른쪽과 왼쪽 벽을 각각 맡았고, 수련회에 참석한 성도들이 함께 도와 모두 내 손으로 성전을 짓는다는 기쁨으로 하나하나 돌을 쌓아올렸다.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은 성도들의 피땀으로 세워진 돌성전이자 성령 역사가 아니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던 당시 한국 성령운동의 산물이었다. 그야말로 위대한 신앙인들의 고백으로 세워진 성소로서 그 의의를 갖는 건물이 바로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인 것이다.

건축면적이 250평에 달하는 당시로서 거대한 성전이었지만 평평한 마룻바닥에 성도들이 틈 없이 밀착하고 또 밀착해서 앉아도 다 못 들어와 성전 문밖으로, 옆 창가마다 모여 귀를 기울이며 은혜 받던 풍경이 당시로선 낯설지가 않았다. 결국 대성전도 성도를 수용하기 모자라 야외 숲속집회광장이 용문산기도원을 상징하는 명소가 되었지만, 대성전은 당시의 성령운동과 은혜 받던 공간을 대표하는 역사적 산물로서 그 가치를 가지면서 지금까지 60년을 지내오고 있다.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은 바로 이같은 역사성과 돌과 편평한 마룻바닥에 함축된 용도와 성전 건축의 동기, 한국 성령운동의 산실로서 조명되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