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관 쓰신 예수님 / 화가 임윤임
이미 시작된 새 창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영광 사이의 존재론적 전환 (고후 5:17, 롬 8:10-11, 고전 15:20-23)
기독교 신앙의 심장이 십자가에 있다면, 그 신앙의 생명력 있는 호흡은 부활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는 깊은 회개와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만, 정작 부활 앞에서는 교리적인 동의나 피상적인 위로의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십자가가 우리의 죄와 비참함의 문제를 직면하고 폭로하는 통렬한 자리라면,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 역사 한가운데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의 질서를 여시는 위대한 창조 행위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비롯한 많은 신앙 공동체는 여전히 십자가의 대속을 치열하게 말하지만, 부활의 현재적 실재를 충분히 사유하거나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부활을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사후 세계의 보장이나 유약한 위로의 메시지로 축소해 버리곤 한다. 물론 부활 신앙 안에는 죽음 너머의 궁극적인 소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부활은 결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일어날 사건으로만 유보되지 않는다.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현재를 뒤바꾸는 폭발적인 능력이며, 인간 존재의 지평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열어젖히는 우주적이고 실존적인 사건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조의 한 항목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속한 존재의 영역 자체가 옛 질서에서 새 질서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선언하는 신앙적 고백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하며 이 혁명적인 진리를 천명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도덕적 개선이나 점진적인 성품의 변화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헬라어 원문의 뉘앙스는 ‘새로운 창조’ 그 자체에 가깝다. 이는 곧 옛 질서가 완전히 종식되고,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를 지으셨으며 이미 종말론적 새 창조를 역사 속에 시작하셨다는 급진적인 선언이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 한 사람이 죽음을 이기고 생존한 기적이 아니라, 인류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전 인류의 새로운 시작이 열린 거대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존재론적 새 창조’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뼈를 깎는 노력과 의지로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자기 계발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존재의 기반을 허락하시는 주권적인 은혜의 개입이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정체성, 곧 죄와 죽음이 지배하던 옛 창조의 영역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생명이 다스리는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영적인 ‘위치 이동’을 경험한 자들이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기복이나 심리적 회복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존재의 전환이자 위치와 근거의 질적인 변화이다.
이러한 이해를 돕기 위해 신학자 라이트(N. T. Wright)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그는 부활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새 창조를 시작하신 사건”이라고 강력하게 강조한다. 그의 통찰에 따르면, 부활은 결코 개인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구원받는다는 식의 축소된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부활은 하나님의 원대한 창조 계획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되었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즉, 부활은 타락하고 망가진 이 세상으로부터 영적인 도피나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온전히 새롭게 갱신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사건이다.
이 위대한 존재론적 새 창조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자기 이해’를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다. 존재론적 새 창조의 첫 열매로 살아가는 우리는, 더 이상 씻을 수 없는 죄책감에 결박된 존재가 아니며 과거의 뼈아픈 실패나 상처로 규정되는 자들이 아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실패를 가리켜 우리의 본질이라고 조롱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정의되며 우리의 진짜 이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된다. 이 새롭고 영광스러운 정체성은 우리가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살았기 때문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수여하신 흔들리지 않는 ‘존재적 선물’이다. 우리는 이미 새 창조의 영역 안에 당당히 들어와 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생명으로 연합된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치열한 딜레마를 마주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새 창조는 아직 우리에게 완성된 상태로 주어지지 않았다. 부활의 영광스러운 생명은 분명히 우리 안에 시작되었지만, 최종적인 완성은 여전히 미래에 남아 있다.
우리는 부활이 이룩한 ‘이미’와 완전한 회복을 기다리는 ‘아직’ 사이의 팽팽한 긴장 속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 속의 우리는 여전히 실패하고, 연약함에 흔들리며, 상처받는다. 두려움과 무한 경쟁, 그리고 절망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우리를 덮쳐온다.
우리가 여전히 이러한 옛 존재의 습관과 두려움에 얽매여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부활을 현재 우리의 실재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다가올 미래의 위안으로만 마음속에 보관해 두었기 때문이다.
부활을 지금 여기서 나의 존재 근거로 삼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은 창조적 능력을 상실한 채 굳어버린 종교적 습관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존재를 바꿀 때, 두려움에 잠겨 숨어 있던 초대 교회의 제자들이 세상 앞에 생명의 증언자로 섰던 것처럼 우리 삶의 방향 역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부활 신앙은 끊임없이 옛 습관을 벗어던지고 새 존재의 질서를 배우며 자라나는 여정이다.
나아가 부활 신앙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마저 변화시킨다. 세상은 단순히 심판받고 폐기될 대상이 아니라, 마침내 새롭게 변화되어야 할 창조의 무대이다. 교회는 바로 이 새 창조의 영광을 세상에 미리 보여주는 ‘전초기지(outpost)’이다. 만일 교회가 입술로는 부활을 말하면서도 세상의 낡은 권력 구조와 무자비한 경쟁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부활의 실재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다는 뼈아픈 증거일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패배를 견딘 자들에게 주어지는 사후의 보상이 아니다. 십자가가 인간 죄악의 처절한 깊이를 낱낱이 드러냈다면, 부활은 그 깊이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더 크고 거대하다는 것을 우주적으로 증명해낸 십자가 사랑의 완성이다. 세상의 폭력과 사망이 역사에 대해 결코 마지막 말을 할 수 없다는 선언이 바로 부활이다. 부활 신앙은 평범한 하루, 고단한 노동, 관계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끊임없이 ‘생명의 논리’를 선택하도록 우리를 추동한다. 절망 대신 소망을, 냉소 대신 사랑을 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새 창조를 살아가는 자의 일상이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의 영혼을 향해 가장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부활을 믿는가? 아니면 부활 안에 사는가? 우리는 부활을 먼 미래의 위안으로 간직하고 있는가? 아니면 오늘을 돌파해 내는 현재의 능력으로 붙들고 있는가? 부활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 박제될 수 없고, 미래의 교리로만 남겨질 수도 없는 현재의 현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정녕 살아 계신다면, 우리는 결단코 이전의 옛 존재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음 이후를 막연히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새 존재로 살아가겠다는 실존적 결단이다. 존재론적 새 창조는 결코 교리서의 한 장이 아니라 우리의 치열한 삶의 장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부활은 끝이 아니라 위대한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오늘, 우리의 안일한 존재 방식에 가장 강력하게 도전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이것이 바로 타협할 수 없는 복음의 영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