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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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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나운몽 목사 학술 세미나 요약과 해설 제2편

故 나운몽 목사 학술 세미나 요약과 해설 제2편 관련 기존 복음신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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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된 한국교회에 ‘길 위의 전도현장에서 나온 나운몽신학’ 적용 필요성 제시 …

이덕주 교수 “전통과 소통한다면 한국교회에 에너제틱한 신학으로 자리매김할 것”

김찬국 교수를 제외하고는 감리교 신학자를 중에서 나운몽의 한국복음화론과 그것의 이단규정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한 이는 없었다. 이 점에서 보면 나운몽에게는 그의 설교를 경청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지만, 신학의 면에서는 지지자를 얻지 못한 외롭고 반동적인 인물이었다.

김흥수 교수 발표 논문 해설 :(편집자 주)

김흥수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나운몽종교운동에 대한 교계의 이단시비는 두 단계로 진화했다.

처음 단계에는 근거 없는 개인 건덕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거짓으로 꾸며서 작성된 1954년 예장 경북노회의 조사보고서가 단초가 되어 이후 총회와 타 교파까지 이단의 근거로 인용되었다는 것은 놀라움을 자아낸다. 이는 나운몽에 대한 이단 정죄가 그의 종교운동의 교세 확장에 위협을 느낀 기성교단의 위기의식이 발단이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조사위원 김삼대의 후일담도 이와 같았다.

두번째 단계는 신학적인 이단 규명을 시도한 것이었다. 1968년 예장(고신) 경남노회가 노회원의 강사초빙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나운몽의 설교내용을 문제삼은 것이다. 교권이 나운몽을 이단으로 정죄한 후 14년 만에 처음으로 신학적 판단을 시도했다는 것은 앞뒤가 바뀌어도 너무 한참 바뀐 것이다. 나운몽은 경남노회가 자신의 설교내용을 왜곡했다며 문제삼은 부분을 적극적으로 해명하거나 반박했다.(상세 내용은 논문전재 참고)

김흥수 교수는 결론에서 “그의 설교 내용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에 대해 덜 적대적이었던 한국감리교회의 입장에서는 이해 가능하거나 용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서, “감리교회가 나운몽의 종교운동을 이단시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논문은 나운몽 목사가 이단으로 몰려간 과정이 과거의 슬라이드를 보듯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운몽 목사에 대한 이단 시비가 순전히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이탈하지 않은 성경해석의 문제에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에 대한 이단시비의 발단이 마녀사냥처럼 무책임하게 조작돼 이루어졌음을 보았다. 이것이 나운몽 목사가 일생을 전도에 온 몸을 바치고 한국교회 부흥에 큰 영향을 미치고도 평생 이단시비의 꼬리표를 달고 산 원인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이로써 지금도 아예 그를 모르거나 그의 글이나 설교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막연히 이단으로 아는 교인들이 많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그가 전했던 순수한 은혜와 성령의 감동을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그 많은 핍박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변질되지 않고, 또 은혜의 감격과 전도의 사명이 소멸되거나 위축되지 않고, 끝까지 건강한 신앙을 견지하므로 오직 전도자로서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가장 우선인 하나님과 동행하는 굳건한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굳게 표준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나운몽 신학에 대하여’ 이덕주 교수(감신대/한국교회사)

나 운몽 선생님은 수많은 대중적 인기와 제자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그의 기독교도리학 서문에서 “스승 없는 고아 신학자”라고 자평했듯 신학적으로는 외로움과 고독을 느꼈다. 평생 그를 따라다녔던 이단시비와 정상적인 게 아닌 일방적인 매도를 당하며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신학은 그가 양반 집안에 유교를 공부했고, 어머니를 따라 주일학교를 다녔고, 청년시절 방황하며 불교에 관심을 보이는 등 여러 종교 체험이 녹아서 나온 신학이다. 그의 신학형성 배경은 중생체험, 성경, 전도사명 이 세가지가 그의 삶과 신학의 주요 바탕이자 요소가 되었다. 특히 그의 신학의 출발과 내용, 결론의 모든 것이 ‘성경’일 만큼 그의 신학은 성경을 빼고는 성립이 안된다. 성경을 전하고 가르치다 보니 교안을 짜게 되고 이로써 신학을 형성해 갔으며, 공격에 대해 변증을 하고, 복음신문, 저술 등 문서전도의 효율성을 중시하면서 그의 신학이 완성되었다.

나운몽 신학의 특징은 첫째, 문자주의 성경신학이다. 성경 본문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해 성경에 있으면 진리, 없으면 사이비였다. 반면 이로인해 지나칠 정도로 문자에 치중하는 한계를 나타내게 됐다. 둘째, 포괄주의 전도신학이다. 그는 정감록 신봉자에게 주역을 공부하거나 유교 불교 신자에게 전도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로 풀어갔다. 처음부터 개종하라는 배타적 공세적 전도가 아니라 개종을 목적으로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지만 한계와 문제를 보완하는 종교로서 기독교를 소개했다. 그의 “진리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도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보수주의적, 교리주의적인 장로교가 거북스럽게 받아들여 이단시비의 발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포괄적 전도신학은 철저히 전도가 목적이었으며 그들을 완성된 기독교로 유인하고 개종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세째, 종말론적 역사신학이었다. 그는 아담 타락 이후 6천년을 ‘개조’ 과정으로 보고 재림 이후 안식천년을 ‘귀일’ 과정으로 설명했다. ‘창조와 개조’에 이어 ‘귀일’이 중요한 신학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는 역사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 신앙 때문에 인류 역사와 민족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네째, 민족주의 정치신학이다. 식민과 분단, 전쟁 등 가장 어렵던 역사적 배경에서 나운몽은 강한 민족주의 신앙을 형성했다. 종교를 정치보다 상위 개념으로 보고 인류와 한민족의 역사에도 “하늘의 뜻에 순종하면 흥하고 거역하면 망한다”는 일관된 종교원리를 적용했다. 그만큼 나운몽에게 기독교는 절대가치였고, 따라서 역사를 이끄는 교회의 사명을 중시했다. 교회가 민족을 구원해야 하고, 종교가 통일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 그가 3번이나 북진운동을 전개한 이유이다.

이로써 나운몽신학의 의미를 본다면 ‘성경의 신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성경’에서 ‘신학’을 끄집어냈다. 장로교와도 성경구절을 들어 하나하나 대립했다. 또한 ‘체험의 신학’이었다. 은혜를 받은 대로 전하고 집필한 말이고 글이기에 그는 교회와 세상을 향해 당당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장의 신학’이었다. 도서관이나 서재에서가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 이루어진 신학이다. 길 위에서 현장에서 형성된 신학이었기에 현장에서 사역하는 전도자나 목회자들에게 효과적으로 통할 수 있었다. 그의 신학은 이론보다 실천에 강했다. 그러나 그의 신학에도 한계가 있다. 기성교단의 ‘전통적인’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무리한 해석이나 오해를 받을 소지가 많았다. 지나친 문자주의 성경해석으로 창조 6일의 과정을 개조 6천년에 비유해 개조 역사의 종말을 설명했다. 포괄적 전도신앙으로 유불선의 긍정적 면을 말한 반면 유불선의 구원가능성에 대해선 풀리지 않는 난제로 남겼다. 그의 종말론적 역사신학으로 보면 늦어도 2300년대에는 주님이 오셔야 한다. 그는 때를 명시하진 않았지만 그의 논리는 종말론자들이 빠질 수 있는 오류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민족주의 정치신학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보수우익적 가치에 치중하는 한계를 드러내므로 중도적 공평한 사회구원에 한계를 보였다.

결론으로 나운몽신학의 수용과제와 한국신학사상사속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나운몽은 ‘감리교 장로’의 평신도로서 자의식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나는 심령부흥과 평신도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감리교인이지 감리교인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인 것은 아니다. 나는 내 교파 내 교회를 사랑하는 심정으로 타 교파를 사랑하고 싶다. 그런데 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있는 교회를 말함이다.” 이로써 평신도 초교파운동을 전개한 그는 1978년 대통령령에 의해 교파 없는 ‘기도원 철거령’이 내려지자 용문산 30여 기도원과 270여 교회를 감리교단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두고 삼남연회와 협의했다. 계약 체결 직전 미국 국제오순절성결회가 같은 제안을 해오자 대다수의 제자들의 요청으로 미국오성과 제휴하고 목사안수와 감독취임을 했다. 이후 2009년 별세 직전 ‘감리교로 돌아가라’는 유언을 남기므로 감리교단 귀속작업이 이뤄졌다. 남은 것은 신학적인 귀화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신학지침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성경에 계시되었고, 전통에 의해 조명되고, 개인적 경험에 의해 살아 움직이게 되고, 이성에 의해 (설득)확인된다는 웨슬리의 유산을 계승하여 복음이 한국문화에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게 하는 신학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이다. 이 다섯가지 중 나운몽신학은 성경, 경험, 이성, 한국문화 부분에 부족함이 없지만 다만 전통 부분이 가장 약하다. 그의 기독교도리학에 ‘교회론’이 없는 이유다. 교회 밖에서 교회와 거리를 두고 운동을 한 것이, 그의 표현대로 ‘고독한 신학자’의 길을 가게 했다. 나운몽은 교리와 성경이 충돌하면 성경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교리는 바울시대부터 보편적 합의를 거친 2000년 전통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전통과 나운몽신학이 소통한다면 다시 한번 한국교회에 에너제틱한 신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