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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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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주체성의 자각 위에 한국기독교 제시

자기주체성의 자각 위에 한국기독교 제시 관련 기존 복음신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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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몽 목사는 한국적 기독교 이해라는 패러다임 제시 …

기독교가 영속적인 한국인의 종교로 민족을 복음화하려면 이런 사상적 접근 필요”

한국 교계가 침체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의 근본을 찾으려는 움직임과 영성 회복에 대한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이때 1950년대 이후 한국교회 부흥운동기의 성령운동의 대표 주자였던 나운몽 목사에 대한 조명을 중심으로 ‘영적 성장을 위한 영성학술세미나’가 갈보리영성훈련원 주최로 개최됐다. 세미나는 강춘오 목사(교회연합신문발행인)가 ‘용문산기도원과 나운몽 목사의 영성’, 나서영 박사(용문산기도원 원장)가 ‘나운몽 목사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김성영 박사(전 성결대 총장)가 ‘세속화 시대와 사명자의 영성’을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이에 본 란에 학술영성세미나의 강연 요지를 발체해 싣는다.

용문산기도원과 나운몽 목사의 영성: 강춘오 목사

1980년대 초 성결교회 방인근 목사는 ‘한국기독교의 3대 걸물’이란 주제로 함석헌, 나운몽, 조용기가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글을 남겼다.(1982, 풀빛목회) 방 목사는 함석헌을 “한국역사에 성서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으로, 나운몽은 “한국적 방법론으로 신학을 시도한 사람”으로, 조용기는 “한국민의 의식구조를 개혁한 국민교육가”로 평가했다. 방 목사는 글에서 “한국 신학이란게 있는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또는 동양의 방법론으로 신학을 시도한 사람이 있다. 나운몽이다. 어떤 의미에서 서구적인 것에 오염되지 않은 ‘생각하는 방법’을 가지고 성서를 대한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운몽은 한국 기독교 100년사에 내놓을 인물이라고 본다”고 평가했다.

1. 나운몽의 신비체험: 나운몽은 신비주의자도 아니고, 종교를 창시하려던 교주도 아니다. 그는 일제하에 고통 받는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국민의 정신을 깨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진 민족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체험한 것은 기독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던 1942년의 일이다. 나운몽이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인 1940년 지금의 용문산 기도원이 있는 김천 어모면 능치리 뒷산에 토실을 만들어 생식을 하며 불경을 외우며 수련을 하던 중 “네 마음을 청결하라. 그리하면 나를 보리라”는 음성을 들었다. 누구 음성인지도 모른 채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마음이 방바닥인가 닦아내게. 성결이면 성결이지 청결이 뭡니까?”라고 대꾸했다. 다시 같은 음성으로 “마태복음 5장을 보라. 맑은 청자니라”고 했다. 나운몽은 밤새 뒤척이면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으면 금강경이나 화엄경을 보라 할 것이지 왜 하필 예수쟁이들 책을 보라하는가 하고 번민했다. 날이 새자 곧바로 도치랑 마을에 있는 능치교회로 찾아가 그곳 전도사에게 성경을 빌려 마태복음을 읽었다.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는 구절을 발견하고는 기독교인이 됐다. 그는 능치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김천에서 올라온 조선출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세기 중엽 최제우는 유사한 신비체험 후 교회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동학을 창시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인내천 사상인 천도교 교리는 천주교 성경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신비 체험후 어떤 지도자의 안내를 받느냐에 따라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다른 길도 갈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행 9:10~18)

2. 나운몽의 애향숙과 용문산기도원: 일본에서 돌아온 나운몽이 어모면 능치리에 1940년에 세운 애향숙은 처음부터 종교운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순전히 일제 식민치하에 있는 민중을 깨우려는 문맹퇴치 및 애국애족 계몽운동이었다. 그런데 1942년 나운몽이 기독교에 귀의하고 일제의 핍박으로 애향숙을 닫고 서울로 올라와 수표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해방 후 1947년 다시 능치리로 돌아가 용문산기도원을 설립한 것이 종교운동의 시작이었다. 용문산기도원의 설립 목적은 애향숙과 구국기도를 접목하는데 있었다. 한국기독교에서 기도원운동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용문산기도원은 ‘구국기도’가 주 목적었지, 흔히 비판하는 것처럼 은사체험이나 신비주의 운동이 아니었다. 입신, 방언, 신유 등 오순절 성령운동의 은사들이 나타난 것은 기도원이 설립된 후에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용문산으로 모여들고, 기도의 불이 붙어 여러가지 은사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이다. 그런 현상은 이미 20세기 초에 미국교회에서 나타난 현대 오순절 성령운동의 은사들이라는 사실을 당시 한국교회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교회사가들이나 이단연구가들이 용문산기도원을 문선명의 통일교와 박태선의 전도관과 한 묶음으로 보고, 단순한 기독교 신비주의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3. 현대오순절 성령운동의 은사: 1901년 1월 3일 미국 캔사스주 토폐카 시에서 일어난 현대 오순절 성령운동은 챨스 파아함이라는 감리교 목사가 운영하는 벧엘신학교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이 학교의 프로그램은 성경만을 교과서로 귀납적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 기도탑이 있어서 자원한 학생들에 의해 24시간 기도가 계속됐고, 실천적 봉사로서 토폐카 시민들의 가정을 방문해 전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1901년 새해에 사도행전의 오순절 역사를 공부하던 12명의 학생들이 갑자기 방언을 했다. 이것이 현대 오순절 성령운동의 시작이다. 그 후 파아함은 미국전역을 돌아다니며 신유집회를 했다. 처음에는 이를 이단운동으로 보고 냉정했던 미국 교회가 차츰 오순절 운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윌리암 씨무어의 로스엔젤레스에서 일어난 부흥집회의 영향이 컸다. 그 때까지도 장로교회에서는 방언이 거의 없었다. 용문산기도원을 장로교에서 신비주의 운동으로 본것은 바로 이 현대 오순절 운동의 은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한국교회 초기 성령운동 혹은 부흥운동은 사경회와 기도운동이었는데, 이것은 ‘은사운동’이 아니라 ‘회개운동’이었다. 한국교회는 용문산 운동이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이 같은 은사운동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교인들은 용문산기도원에서 나타나는 이 신비한 현상을 체험해보고자 용문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이 장로교인이었다. 이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가 1954년 3월 제54회 정기노회에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나운몽을 ‘변태성 신앙운동자’로 규정한 이유이다. 당시 경북노회의 조사가 미흡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2014년 기감 삼남연회가 개최한 ‘나운몽과 용문산기도원에 대한 학술세미나’에서 김흥수, 이덕주, 서영석 교수가 발표한 발제문을 참고하라.

4. 나운몽의 용문산운동은 문선명의 통일교나 박태선의 전도관 운동과는 그 길이 전혀 달랐다: 문선명은 처음부터 김백문의 ‘기독교근본원리’를 바탕으로 자신이 메시야가 되고자 새로운 교주우상주의 종교를 만들어 ‘종파운동’으로 나갔고, 박태선은 한때의 인기에 영합되어 기독교를 버리고 ‘천부교’를 창립해 스스로 천부의 자리에 올랐다. 둘 다 기독교를 잠깐 이용하고 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운몽은 인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도 교주화를 경계했고, 기성교회가 이단으로 매도하고 같은 테이블에 앉기를 거부했음에도 끝까지 한국교회 안에 머물렀다. 최초에 나운몽을 조사한 경북노회가 현대오순절운동의 흐름과 기성교회에 소속된 나운몽의 위치를 조금만 살폈어도 전혀 다른 결론이 나왔을 것이다. 이는 경북노회 조사위원 김삼대 목사가 25년이 지난 후에 낸 성명서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용문산운동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얼마나 깊었던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나운몽이 기성교회를 교권주의라고 비판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비판자들은 그의 설교 속에서 앞뒤 문맥은 다 자른 채 공자 석가도 신이 보낸 동방의 선지자다, 진리라면 유교 불교 기독교가 하나이다 라는 말을 들어 “동양적 특수 신령철학을 제창하여 주역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비난했다. 이는 그만큼 나운몽의 성경을 보는 사상적 사고의 폭이 넓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타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거나 종교 혼합주의를 주창하는 것이 아니다. 나운몽은 자신의 설교를 빌미로 이단시비를 하며 “유교나 불교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유교나 불교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설교문에 분명히 명기되어 있다. 즉 유교는 하나님의 공의 면에 치우친 도덕교훈에 불과하고, 불교는 하나님의 사랑 면에 치우친 지비교훈에 불과한 것이다. 공자나 석가가 인류의 죄값인 사망을 대속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밝히 말했다. 모세의 율법이나 엘리야의 예언을 믿는 다고 구원이 아니고 이 모든 교훈은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5. 나운몽의 ‘삽겹줄’ 전도운동과 ‘동방의 한나라’ : 삼겹줄 전도운동과 동방의 한나라는 용문산운동의 대표적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삼겹줄 전도운동은 전도자 나운몽의 사명이고, 동방의 한나라는 민족주의자인 신앙인 나운몽의 역사인식이다.

1) 삼겹줄 전도운동: 나운몽은 자신의 신앙체험을 기본으로 한민족의 살 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기독교밖에 없다고 믿고, 전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전도서 4장 12절의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근거로 부흥전도, 문서전도, 기도전도라는 세 가지 전도운동을 전개했다. 나운몽은 이 삼겹줄 전도에 대해 “부흥전도가 정적(情的)분야이고, 문서전도가 지적(知的)분야라면 기도전도는 의적(意的)분야에 속한다. 부흥전도는 말을 통해 하고 문서전도는 글을 통해 하며 기도전도는 기도를 통해 한다. 말과 글은 유형적 수단으로 하는 것이나 기도전도는 신령적 방법으로 한다”고 정의했다.

2) 동방의 한나라: 나운몽의 신앙사상의 정수는 이 동방의 한나라에 모아져 있다. 나운몽은 이렇게 말한다.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기던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그 기업을 빼앗긴 것같이, 혈육으로 난 이스마엘이 쫓겨나고 둘째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의 기업을 누리게 된 것처럼, 첫 아벨은 가인에게 죽고 둘째 아벨 셋이 아담의 종주손이 된 것같이 벨렉의 후손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죽임으로 신령의 포도원을 빼앗기고 그 동생 욕단의 후손이 그 기업을 누리게 되었다. 욕단의 후손은 동쪽으로 천동하여 동양족속을 이루고 그 중에도 약한 족속이 해 돋는 곳으로 와 백두산까지 이르러 해 떠올라오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새 출발의 기점으로 삼고 퍼진 백의민족이다. 이 백의민족은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룩될 새 땅에 종주손이 되어 동방의 한나라를 이룩할 족속이다.” 이는 성경과 기독교신앙을 민족사상의 근간으로 삼고 기독교를 민족종교화하려는 토착화의 한 시도이다.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조선의 선각적 신앙인들은 기독교를 단순한 서양종교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동양과 조선의 현실을 치열하게 파악하고 자기주체성을 지닌 자각 위에서 한국 기독교를 개척하려 했다. 이러한 주체성 위에서 나운몽은 한국적 기독교 이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운몽의 동방의 한나라는 유영모나 함석헌에 못지않은 한민족 사상을 담고 있다. 기독교가 앞으로 500년, 1000년 한국인의 종교로서 민족을 복음화하고 인도하려면 이런 사상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나운몽은 자신의 성령체험과 이후 은사체험이 너무나 강렬해 한민족을 민족 자각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그것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나운몽의 영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운몽 목사의 영성운동을 이단운동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제 남은 사람들이 그의 신앙과 사상을 재해석해 한국교회의 자산으로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