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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살아날 영적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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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나운몽 목사 학술세미나 요약·해설 제5편 …

심광석교수 “나운몽신학, 화석화된 교리를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구원의 도리학으로 풀어내”

본란은 지난 7월 15일 감리교 삼남연회 본부에서 열린 ‘나운몽(장로)과 용문산 기도원’ 주제의 학술세미나 발제 논문에 대한 ‘요약과 해설’을 지금까지 4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나운몽 종교운동의 이단문제’(김흥수 목원대 교수), ‘나운몽 신학에 대하여’(이덕주 감신대 교수/역사신학), ‘애향숙 용문산기도원과 기도원운동’(서영석 협성대 교수)의 총 3편의 논문을 통해 용문산기도원운동의 이단 문제와 신학적 의의, 운동의 성격 등 전반을 고찰하므로 고 나운몽 목사님에 대해 그동안 가려져 있던 진실을 상당 부분 해소시켜 주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번 호부터는 세미나 발제 논문에 대한 논평(심광석 교수, 유장환 교수, 황영배 교수)을 간단이 소개한 뒤, 총론으로 마무리하면서 ‘고 나운몽 목사 학술세미나 요약·해설’을 모두 매듭짓고자 한다.

논평 요약

1. 심광석 교수(감리교신학대학) :

이덕주 교수는 나운몽신학의 형성 배경에 대해 ‘극적 체험’이란 계기를 중시했지만, 나운몽은 ‘애향숙’ 생활원칙에서 볼 수 있듯 서양 근대적 의미의 디아코니아를 만들고 지속적 훈련과 교육을 중시했다. 이는 불연속적 체험이 아니라 그가 어머니를 따라 주일학교부터 익혔던 복음이 내면안에서 연속적 체험으로 체화된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나운몽신학의 특징에서 그의 성경관을 문자주의로 규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근본주의가 말하는 문자주의와 다르기 때문이다. 나운몽은 성경을 죽은 문자로서가 아닌 은유와 의미로 되살려 화석화된 교리를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구원의 도리학임을 풀어 밝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운몽의 “성경대로”는 문자주의에 함몰된 독단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지적, 실제적 경험을 복음적 구원으로 인도하는 복음주의이다. 나운몽의 종말론적 역사관은 창세기에 근거한 창조-개조-귀일로서 요즘 유행하는 신학용어로서 “새창조론”이라 칭하고 싶다. 나운몽신학의 의미와 한계에 있어, 그의 전통종교를 일정정도 긍정하는 복음전도의 포괄적 성취론의 전도 방식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독한 배타주의와 독선주의로 지탄받는 시점에서 계승 발전해야 할 훌륭한 전도이론이요 방법이다. 이덕주교수에 의해 나운몽신학에 대한 개요가 제시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성경, 전도, 역사, 민족주의로 제한된 것은 아쉽다. 여기에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기도원에 대한 이해 등이 전개되었으면 한다. 그렇다면 그의 신학의 약점으로 제기된 교회론의 부재가 아니라 그의 평생 사역 현장이었던 기도원공동체 자체가 교회가 되고, 기존의 현실 교회를 보완하고 활성화하는 장점으로서 수령·수행의 수도원으로 발전하여, 용문산기도원의 감리교단 귀속 작업이 기존 교단의 확장의 관점이 아니라 기존 교회와 영성 수도원의 두 중심축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운몽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있는 교회”를 이룩하기 위해 평생 헌신했다.

김흥수 교수는 ‘나운몽 종교운동의 이단문제’를 통해 나운몽 종교운동에 대한 특정 장로교단의 이단시비는 근거가 없는 비난과 질시에서 나온 것이며, 한국 감리교회가 나운몽의 종교운동을 이단시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점을 치밀한 근거자료를 들어 입증 소개했다. 그러나 여러 사례로 얘기한 점을 보완할 적극적 신학적 변증이 없었던 점은 아쉽다. 서영석 교수는 ‘애향숙과 기도원운동’에서 나운몽을 신비주의 운동으로 규정하고 현실도피적 탈교회성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당시 기성교회가 교인들의 심리,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면서 용문산운동을 비롯한 성령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고 용문산기도원을 평가한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용문산운동은 기도운동에서 세상에 참여하는 전체적인 운동으로 구성됐다. 나운몽에 대한 이단 시비 문제는 서 교수의 말대로 “정규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것” 이것이 원인이 아니라 당시 경상도 장로교단의 교리적 보수성과 인간적 질시에서 나온 것이라 보아야 하지 않겠나. 정규 신학을 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창조적 신학 해석과 구성이 나온 점이 많기 때문에 이런점을 적극적으로 살려야 할 것이다.

2. 유장환 교수(목원대학교) :

이덕주 교수는 나 장로님에 대해 그동안 신학자로 연구되지 못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사회변혁을 지향했던 칼바르트가 신학을 오직 그리스도론에서만 찾았지만 말씀의 신학자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나 장로님은 하나님 말씀으로 성령 안에서 신학을 출발했고, 전도를 위해 사회와 역사에 적응하는 변화를 추구했다. 따라서 그는 성경해석의 문자주의가 갖는 배타주의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한국적 상황속에 적응시켰다. 그러한 그의 포괄주의 전도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나 장로님의 논리에 맞는 조직신학을 세련되게 재발견하고, 그의 역사신학과 종교신학을 더 심층적으로 과제화해야 할 것이다.

서영석 교수는 기도원운동을 신비주의와 열광주의의 이미지와 결부시켰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신비주의가 없을 수 없다. 어떤 신비주의냐가 중요한데, 성령운동을 한 존 웨슬레처럼 나장로님의 신비주의도 정당하게 평가돼야 한다. 특히 나장로님은 내면의 신앙에만 머물지 않고 통일문제와 역사문제에 예언자적 역할을 했다. 따라서 나장로님은 말씀의 신학자였고, 살아 역사하는 현실문제와 연관된 역사적 신비주의였으며, 우리의 문화와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찾고자 했던 토착화신학의 전도자이자 선구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적 신학의 완성이란 차원의 세계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영적 자산이다.

3. 황영배 교수(협성대학교):

선교에 있어 최근의 중요한 화두가 ‘자선교학’으로서 적합한 선교 개발이다. “각 나라마다 고유의 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신학할 수 있어야 한다”와 “스스로 개발한 선교학으로서 시대에 적합한 선교적 방법론”이란 명제를 충족시키는 자신학을 이름이다. 나장로님은 이미 그 시대에 자신학을 했다. 자신학화가 한국 기독교를 서구 신학의 중간 통로에 머물지 않고 건강한 교회로 발전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중요한 잣대는 성서적으로 옳으냐, 문화적으로 적합하냐의 잣대를 갖는 것이다. 이덕주 교수가 제시한 나 장로님의 포괄주의 전도신학은 이단논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중 타종교에는 특별계시가 없다고 한다면 이단논쟁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나 장로님은 타종교에 구원이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서영 목사도 부친의 신학을 우호적 배타주의로 규정하였다. 서영석 교수는 나 장로님의 기도원운동을 현실도피적 신비주의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했지만, 용문산기도원운동은 농촌계몽운동에서부터 출발한 통전적 선교를 추구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는 이 땅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회구원을 지향하므로 복음주의 진영에서 일어난 에큐메니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고 나운몽 목사 학술세미나

요약·해설 총 결론(편집자 주)

고 나운몽 목사님에 대한 학술세미나가 작금에야 열린 것은 만시지탄이 있지만 한국 교회 부흥의 근거를 탄탄하게 뒷바침해 줄 중요한 불씨를 살려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세미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학술세미나를 통해 볼 수 있었던 고 나운몽 목사님과 용문산운동의 의의를 총 결론으로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가 부흥의 역사성을 찾을 근거를 보았다. 6.25전쟁 이후 수많은 사이비 종파들이 한국 사회의 극도의 혼란기를 틈타 출현했다. 그동안 한국교회사의 이해는 그것으로 다였다. 한국교회가 세계 기독교 사상 유례없는 부흥을 이루어냈지만, 이 기적적인 부흥의 역사를 설명할 재료는 그동안 한국교회사에 없었다. 기실 1950·60년대의 대부분의 종파운동들이 거대 세력을 형성하며 이단으로 이탈했다. 만약 당시 혼란기의 동시대에 활동했던 문선명·박태선·양도천 등 사이비 종파운동자들과 함께 나운몽 목사님도 함께 모두 같은 길을 갔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희망은 없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같은 시대에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부흥에 이바지한 성령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혼란기에 흔들림 없이 올곧은 신앙운동에 매진했던 선진들에 대한 구명 작업은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 더 절실히 필요하다. 이번 나운몽 목사 학술세미나를 통해 ‘오늘날의 한국교회 부흥의 동력이 성령운동이었다’는 사실에 인식을 같이했다는 점이 의미가 큰 이유이다.

서영석 교수(협성대)는 이 부분에 대해 “결론적으로 195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성장하는데 그 원동력은 성령운동이었고, 그 성령운동의 배후에는 기도원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도원운동의 중심에 용문산기도원이 있었다.”고 정리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난립하던 종파운동의 와중에서 나운몽 목사님이 홀로 어떤 이탈도 없이 교계 안에서, 은혜와 자신학화와 성경대로 전하는 특성을 갖고 곧은 한 길을 견지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교회로서는 소중히 지켜내야 할 위대한 수확이자 자랑스런 역사적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가 당당하게 성령운동의 역사와 맥을 이을 수 있는 이유가 마련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1954년 예장 경북노회에서 나운몽 목사를 처음 이단시한 후 총회와 타 교파까지 이단시의 근거가 된 당시 조사보고서 작성의 주역이었던 김삼대 목사가 1977년 성명서를 발표하고, “그 많은 신흥종교 그룹이 모두 무너지고 통일교파와 전도관파는 기성교회와 유대가 전혀 없지만 나운몽 장로는 건전하게 선교하여 한국교회 부흥에 크게 이바지함은 물론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금일에 이르렀다"고 술회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오늘의 한국교회에 시사하고 있다 하겠다.

둘째, 한국교회가 성령운동의 맥과 이어질 근거를 보았다. 한국교회를 대표할 성령운동이라면 단연, 100여년 전(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로부터 시발된 대부흥운동이다. 길선주 목사(당시 장로) 등이 주도한 부흥사경회에서 회개를 통한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므로, 회개운동과 전도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이후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우며 조선의 기독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발단이자 오늘날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성을 설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후 100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었다. 세대교체를 3번 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그 안에 한국교회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탄압받고 변질되고, 이후에 다시 한국전쟁을 겪으며 100년전의 부흥운동과 너무 큰 계곡을 사이에 두게 됐다. 그 중간에 다시금 한국교회를 위한 실질적인 부흥운동이 필요한 시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1950·60년대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성령운동은 바로 이러한 갈급을 해소하며 오늘의 한국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부흥운동이 되었다. 특히 당시의 성령운동은 수십년간 한국강토 전역에 걸쳐 시간적으로 지역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부흥운동이었다.

당시 상황을 보면 길도 없던 용문산기도원 산골짝에 밀려든 성도들이 수만명씩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연인원으로 보면 당시의 한국교회 신자 수보다 많은 사람들이 용문산기도원에 다녀갔다. 이것이 가능했다는 것은 가족 친적 지인 등 불신자들까지 함께 동반했음을 의미한다. 8월 집회 철이 되면 마치 추석때처럼 서울에서 특별수송열차를 편성했을 정도로 인파가 몰려들었다. 뿐 아니라 당시 나운몽장로는 자신은 물론 부흥전도단을 편성해 제자 신학생들, 수도사들까지 전국으로 나가 하루도 쉬지 않고 전도에 매진했다. 용문산기도원에서든, 순회전도에 나서든, 노방전도든 어디서든 “어느 교회로 오라”는 교파적 개교회주의적 전도가 아니라 “가까운 교회에 나가라”는 순수한 전도운동이자 초교파 부흥운동었다. 당시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사명감에 불타는 성도들은 자교파·자교회에서 전도와 교회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는 정부공식통계상 1960년 당시 62만명에 불과했던 신자수가 1995년 875만명으로 한국교회가 세계 유례없는 성장을 하는 원동력이 됐다. 만약 한국교회가 이같은 기적적이고도 엄연한 사실로서 존재한 성령역사를 자랑스러워하지 못하고, 평가절하하고 폄훼한다면 장기적으로 성령운동의 뿌리와 단절되는 비극을 자초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성령운동은 교회 부흥의 유일한 원천이자 하나님의 섭리였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능력인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운동은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교회부흥시 반드시 나타났던 하나님의 기적적 섭리의 역사였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역사인 성령운동과 맥을 이으므로, 오늘날 잘못된 기복적·이기적 신앙에서 벗어나 전도와 희생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참된 교회로 영속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교회가 기도원이라는 영성개발체계를 가진 근거를 보았다. 나운몽 목사님을 얘기할 때 용문산기도원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신앙운동이 영성훈련의 근거지인 용문산기도원을 모체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한국 기독교 기도원운동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에게 기도원이란 개념은 교파성이나 지역성을 가진 개념이 아니라 초교파적 영성 개발과 신앙 혁신의 장소였다. 교회가 빠질 수 있는 매너리즘에 대해 기도원이 쇄신의 장소로 활용될 수 있는 신앙의 상시 보완적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교회는 생활현장에서 신앙지도를 하고, 기도원은 혁신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수레의 양 바퀴와 같은 한국교회만의 특징적 구도가 탄생한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를 영속적이게 하고, 영성이 함께 중시되며, 이를 통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순수복음주의 노선을 견지할 수 있게 하는 토대로서 작용하고 있다.

네째, 초교파적 평신도 신앙운동이 끼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보았다. 만약 당시에 어느 한 교파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교권주의자에 의한 교세확장’이라는 교파주의의 벽에 부딛혔을 것이다. 타 교파가 합세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1950·60년대 성령운동은 비록 나운몽 목사가 감리교 장로의 신분이었지만 그의 공언대로 ‘초교파적 신앙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당시 그는 평신도의 신분이었으므로 교권주의로부터도 자유로웠다. 비록 이 때문에 그가 교권주의자들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으며 이단시비와 집회 불허의 장애 속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지만, 교파를 초월해 모든 교파의 성도들에게 신앙적 감흥을 일으키는 순수한 신앙운동으로서 보다 큰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로써 초교파적 평신도 신앙운동은 내 교파, 내 교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나’인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독교인의 소명의식에 몰입할 수 있었고, 성령의 능력을 통한 한국복음화와 성도의 역할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동성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