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
예수님의 분부는 순수한 마음으로 약자 도우라는 것 (암 5:12, 마 10:7-8)
현재 위안부 운동이 수요 집회 외의 뚜렷한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향후 방향성에 대한 의미 있는 제안이다.
사실 지금까지 윤미향 당선자를 위시한 진보 운동가들은 수요 집회 같은 전시적 효과에 집중해 왔다. 계속해서 일본에 대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선명성 운동을 강조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외연과 상징 권력만 커졌다.
결과적으로 실효보다 몇 사람의 이해를 위한 대결구도의 현재의 운동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이용수 할머니의 지적은 운동의 문제점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위안부 문제를 특정 세력을 위해서나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
위안부 문제는 우리 민족과 세계가 필히 해결해야 할 전시 여성 인권의 문제이며 역사 왜곡의 문제이다.
이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위안부 운동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그 해결을 위해 전 국가적으로 전향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이 커다란 숙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첫째,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대결 구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우애와 연대’의 가치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 할머니는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다. 이 학생들이 결국은 그 나라 주인이다. 그러니까 이 학생들이 알아야, 뭐 때문에 사죄, 배상을 하라고 하는지 알아야 한다.”라고 한일 학생 역사교육을 강조했다. 일제에 의해 가장 크게 상처 입은 장본인으로서 가장 절박하게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고 가장 객관적인 눈으로 실효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일제가 만든 왜곡된 역사가 아니라 세계가 알고 인정하는 객관적 사실을 제대로 알게 할 한일 학생 역사교육에 집중해야 한다. 할머니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거론하고 있다. 하나는 위안부와 일제 폭력에 대한 교육을 위한 제대로 된 박물관의 건립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과 한국의 학생들에 대한 정확한 역사 교육과 상호 교류를 통한 ‘우애와 연대의 증진’이다. 이런 대안은 ‘코로나 이후’의 세계관, 즉 적대적 관계가 아닌 협력적 국제 관계의 대안으로서도 중요하고 일본의 극우세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으로서도 매우 적합하다.
왜냐하면 일본의 극우세력은 극우답게 ‘힘’(경제력, 무력)을 숭상하는데 우리나라보다 일본이 강국이므로 절대로 위안부 폭력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재 윤미향과 함께하는 진보적 엘리트들은 계속해서 일본에 대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상징 권력만 커지고 있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이용수 할머니의 위의 구상은 일본과 한국에서 자라나는 어린 세대에 의해 극우 파시즘을 밑에서부터 와해시키려는 전략으로 매우 타당하다.
문재인 정부는 이용수 할머니에게서 배워야 한다. 일본과의 미래지향적인 갈등 해결의 전략 구상과 함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약자에 대한 ‘우애와 연대’의 가치로 초점을 전환하므로 우리나라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는 갑의 횡포와 하청 노동자들의 생명의 희생도 줄이는 정책 전환이 될 수 있다.
둘째, 위안부 문제는 특정 단체나 진보운동가들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진보운동가들이 기득권층과 은밀히 연대해 자신들만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그들이 무기로 삼았던 약자를 배제한다는 것은 결국 약자를 이용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입으로는 약자의 대변자처럼 평등을 외쳤지만 극한의 특권과 편법을 누렸던 조국 사태는 진보 운동가들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특권은 선량한 국민에게 구조적 폭력으로서 작용한다. 즉 우리 사회를 분열과 갈등 사회, 그들이 위한다고 말했던 약자를 결국 배제하는 권력 지상주의나 특권 계급 사회로 만든다. 기존의 기득권층처럼 진보 세력이 기득권화되면서 특정 세력을 위한 이익집단화, 정치화하므로 객관성을 잃고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때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일깨워 준 사람은 이 사회의 고통받고 있는 약자 그룹(하청 노동자, 소외계층, 위안부 할머니 등)에 있던 이용수 할머니였다. 그들은 당사자로서 어떤 이권이나 정치적 목적 없이 순수한 눈으로 문제의 핵심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연과 과거 정대협 위주로 구성되었던 위안부 할머니 지원 활동들이 과연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진행돼 왔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또한 2015년 위안부 합의 이후에 그것이 파기되는 과정 속에서도 지금 문재인 정부가 항상 주장했던 더 나은 합의를 현재 어떻게 진척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2015년 위안부 합의가 다수가 보기에 불만족스러운 합의를 했다는 게 문 정부의 원래 주장이었으므로, 그렇다면 개선 방향으로 지금 과연 어떤 절차들이 진행되고 있고 그것이 정부 단위에서 또 시민단체별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할머니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사실, 대립 구도는 그들 리더 그룹의 권력은 키웠으나 전체적으로는 일본과의 관계만 악화됐을 뿐이고 전 국민적인 피해로 돌아오고 있다. 이 문제는 이념이나 진영 논리로 접근해선 안 된다. 만일 할머니의 기자회견이 친일파의 수작이라면 이용수 할머니가 친일파와 한패라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진영논리로 해석하면 결코 위안부 문제의 해결 방안이 나오지 않는다. 할머니들이 모두 연로하셨기 때문에 이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최소한 해결을 봐야 되는 문제이다. 또한 현재의 운동 방향, 수요 집회나 일본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방향성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수요 집회에 참가하신 할머니들까지도 실효성에 의문을 갖고 또는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이번 기회에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하고, 일정 단체가 아닌 전 국가적으로 보다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국제적, 역사적 문제를 특정 단체에 맡긴 결과가 되다 보니 국민들의 성금·후원금·지원금의 회계공시 누락, 개인 계좌 입금, 안성 쉼터 고가매입 등 투명성 부족이 낳은 부작용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이 같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또 위안부 관련 돈을 자기들 취향대로 양심수 석방,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운동 등 단체에 지원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목적 외 지출을 금지하는 장치도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 무엇보다 위안부 운동을 정의연 등 특정 단체가 주도하는 것을 재검토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 친일과 반일 등 이념 갈등을 초래하는 구도와 방향을 종식시켜야 한다. 의혹 제기에 대해 여당이 윤 당선인을 두둔하거나 친일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너무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지금처럼 특정 집단이나 이념에 함몰될 경우 또 다른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국민적 공감대를 기반한 투명한 공적 기관이나 단체가 주도해야 한다. 진정으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평생 한을 위로하고 진정한 쉼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속히 마련해야 한다.
성경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약자를 억울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죄악임을 경고하고 있다.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암 5:12)”
예수님의 분부는 어떤 이익도 바라지 말고 순수하게 약자를 도우라는 것이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7-8)”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눈물을 전 국민이 함께 닦아주어야 한다.
(다음 호 ‘성경과 현실’은 ‘한국에 대한 G7 회의 초청 쾌거와 신냉전 확대’의 시대상에 대해 살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