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 예수님 / 화가 임윤임
복음은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객관적 선언이면서 동시에 친밀한 연합으로 부르시는 사랑의 초대이다 (롬 3:24, 롬 8:15, 요 15:4-5)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심연에는 한 가지 중대한 신학적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복음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이 본질적인 물음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의 경합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의롭다고 판결하셨다는 ‘객관적 선언’으로서의 복음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생명력 넘치는 교제 안으로 들어오라는 ‘관계적 초대’로서의 복음이다. 이 질문은 결코 단순한 수사학적 취향이나 표현상의 차이에 불과한 가벼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 차원 중 어느 곳에 방점을 찍느냐는 우리가 복음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중대한 신학적 분기점이다.
역사적으로 종교개혁 전통은 타락한 인간의 절망적 현실 속에서 복음을 눈부신 ‘선언’의 언어로 분명하게 회복시켜 냈다. 인간은 자신의 어떠한 종교적 공로나 도덕적 성취를 통해서도 스스로를 의롭게 만들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유일한 근거로 삼아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는 통찰이 바로 이 선언적 복음의 핵심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이 “의롭다 하심”을 매우 강력한 법정적 이미지로 설명한다. 죄인은 우주의 엄위한 심판대 앞에 서 있으나,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향해 전격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이 위대한 법정적 선언은 인간의 도덕적 상태나 자격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법정적 차원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복음의 흔들리지 않는 객관성을 굳건히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내면적 감정이 폭풍우처럼 요동칠 때나, 우리의 영적 성취가 한없이 불완전함의 한계를 드러낼 때조차도, 은혜에 입각한 하나님의 이 선언은 결코 철회되거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복음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경험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얄팍한 심리적 위로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실제 역사 안에서 단번에 성취하신 구원의 사건에 단단히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굳건한 선언은 우리 신앙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만약 이 확고한 선언이 없다면, 복음은 한낱 인간의 주관적 체험이나 감정적 위안으로 축소되어 버릴 치명적인 위험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학적 도발과 뼈아픈 반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과연 복음이 이처럼 ‘선언’에만 머물러도 충분한가. 문제는 복음이 단지 선언에만 머물 때 심각하게 발생한다. 만일 복음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무미건조한 판결문으로만 이해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단지 외적인 신분 변화에 그치게 되는 기형적 형태를 띠게 된다. 우리는 입술로는 자신이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의 방식과 내면의 가치관은 거의 달라지지 않는 모순적 현실을 마주할 수 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생생한 인격적 관계는 여전히 추상적인 개념으로 전락하며,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어야 할 신앙은 그저 차가운 교리적 동의로 굳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결코 복음을 이처럼 건조한 차원으로 단순화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는 사람들을 향해 단지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기계적인 선언만을 던지고 무심히 돌아서지 않으셨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삶과 사귐 속으로 그들을 깊이 부르셨다. 이 부르심은 명백한 초대의 언어이다. 참된 복음은 차가운 판결문 한 장이 아니라, 따뜻하고 생명력 있는 관계로의 위대한 초대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의 법정에서 석방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당신의 풍성한 은혜가 차려진 친밀한 식탁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사도 바울의 신학 역시 이 두 가지 차원을 결코 분리하여 사고하지 않는다. 바울은 칭의를 강렬하게 역설함과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롬 6:4~5, 골 2:12)”고 선언한다. 이는 단순한 법적 신분 변화를 훌쩍 뛰어넘는 선언이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심오한 존재의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지 외적으로 법적 잣대에 의해 의롭다 인정받은 자들이 아니라,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된 자들이다. 즉, 온전한 법정적 칭의는 필연적으로 관계적 연합이라는 더 깊고 풍성한 차원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학자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적 통찰은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과 영적 지표를 제공한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단지 교리적 정보의 전달로 보지 않고, 이를 “하나님의 자기-전달”로 이해했다. 하나님은 먼발치에서 우리에게 어떤 건조한 진리를 던져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온전히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너는 의롭다”고 규정짓는 비인격적인 선언이 아니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된다”는 숭고하고도 인격적인 관계적 약속이다. 즉, 선언 자체가 곧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자기-증여의 위대한 사건인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선언과 초대 중 어느 하나로만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으로 복음을 왜곡하게 된다. 만일 선언만을 과도하게 강조한다면, 복음은 차갑고 객관적인 판결로만 남게 될 것이다. 반대로 초대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복음은 감정적 친밀감의 경험으로 축소될 심각한 위험이 있다. 선언은 우리 복음의 흔들리지 않는 근거를 반석처럼 세우고, 초대는 그 반석 위에서 복음의 역동적인 방향을 열어젖힌다. 선언이 우리의 존재적 신분을 바꾼다면, 초대는 우리의 실존적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뼈아픈 현실을 돌아보면, 이 두 차원의 팽팽하고도 아름다운 균형은 이미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미 의롭다”는 피상적인 확신 속에 안주하며, 더 이상의 영적 성장을 멈추어 버린다. 반면, 다른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애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스스로 증명하려 애쓰다가 결국 지쳐버리고 만다. 전자는 위대한 복음을 차가운 법정 안에 옹색하게 가두어 둔 자들이요, 후자는 복음을 변덕스러운 감정의 틀 안에 가두어 둔 자들이다.
복음은 법정의 판결과 인격적인 교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총체적 사건이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얼룩진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심과 동시에, 당신의 품에 따뜻하게 안아 자녀로 삼으신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 유희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호흡하며 살아내야 할 참된 영성의 굳건한 토대이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단순한 선언을 넘어 초대로 깊이 이해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정적 상태를 벗어나 동적인 관계로 비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저 구원받은 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존재로 부름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의 영혼을 향해 엄중한 도전을 던져야만 한다. 우리는 지금 복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그저 설교의 문장 속에만 박제하여 보관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복음을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인격적 관계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복음을 굳게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과의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교제에는 철저히 무관심하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복음은 선언이다. 우리는 전적인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은 초대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원하고도 친밀한 연합 안으로 강력하게 불렸다. 이 두 가지 차원을 함께 꽉 붙들 때 비로소 신앙은 치우치지 않는 온전한 균형을 얻게 된다. 선언은 흔들림 없는 은혜 위에 우리 영혼을 세우고, 초대는 우리를 관계의 역동적인 여정으로 쉼 없이 이끈다. 결국 복음의 장엄한 드라마는 결코 차가운 법정에서 그 막을 내리지 않는다. 그것은 따뜻하고 영원한 집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우주의 재판장으로서 우리를 무죄라 선포하시고, 동시에 자신의 삶 안으로 우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두려움 속에 판결을 듣는 자에서, 사랑하는 분과 영원토록 동행하는 자로 옮겨지는 것이다.
다시 묻는다. 복음은 선언인가, 초대인가. 그 답은 결단코 둘 중 하나가 아니다. 복음은 장엄한 선언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초대이다. 우리는 이 위대하고도 거룩한 긴장 속에서 매일의 지난한 신앙을 치열하게 살아내야만 한다. 바로 그 아프고도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참된 복음의 영성은 마침내 싹트고 시작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