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신문 · 주간 신문“성경으로 과거를 해명한다! 성경으로 현실을 인도한다! 성경으로 미래를 예언한다!”성경으로 현실을 인도합니다
성경과 현실

성경과 현실

한국복음화 기치 높이 들자

한국복음화 기치 높이 들자 관련 기존 복음신문 사진
기존 복음신문 「한국복음화 기치 높이 들자」 기사 사진 · 사진 복음신문 제공 · 복음신문 보유 원본
이 기사 공유

고 나운몽 목사의 유산과 전도지로서 복음신문의 사명 …

하나님의 분부 대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마칠 것(딤후 4:7)

아무도 ‘한국복음화’를 말하지 않던 시절, 남북의 인구를 합해 3000만이던 그 시절에, 용문산기도원의 주일학교 어린이들까지 “3000만 모두 구원받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입버릇처럼 흘러나왔다. 당시 어른들의 기도 제목이 아이들에게까지 자연스럽게 전이된 것이었다. 민족복음화 운동은 그 때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어수선하던 1950년대, 온 국민이 실의에 빠지고 낙담할 때, 당시 나운몽 장로(1914~2009)는 ‘민족복음화’를 주창했다. “한국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민족이 산다”는 것이 ‘한민족복음화’ 운동의 메시지였다. 한민족복음화는 한국의 소망이 됐다.

고 나운몽 목사가 펼친 사역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민족복음화 운동이다. 한국전쟁 이후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민족의 소망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 있다며 회개와 소명을 강조했다. 이는 개인구원에 멎어지는 차원이 아닌, 그의 표현대로 ‘큰 나’인 민족이 같이 사는 길을 제시하는 구국적 성령운동이었고, 이를 통해 한국교회 부흥과 신앙쇄신, 구국기도운동의 확산을 이끌었다. 이로써 나운몽 목사의 사역은 단순한 부흥집회가 아니라 ‘민족복음화+성령운동+구국운동’을 함께 추구했던 전도 운동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같은 구국적 민족복음화 운동은 한국전쟁 후에 갑자기 출현하거나 전개된 것이 아니다. 그 기반은 일제 시대 때 현재 용문산기도원 밑에 동네인 도치랑에서 창설된 애향숙 운동이었다. 그 핵심 정신은 하나님 사랑, 민족 사랑, 국토 사랑이었다. 처음 애향숙 운동을 시작(1940.6.13)하던 일제 강점기에는 문맹퇴치, 농촌계몽, 청년교육 등 지역사회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애향숙 운동은 일제에 의해 민족운동으로 의심받아 고 나운몽 목사가 체포 등 탄압과 이후 망명 길에 오르며 해산되기도 했지만 해방 후에 다시 세워졌고(1947.4.5) 이후 신앙수련 터였던 용문산기도원은 전도운동의 전진 기지로 재 무장되었다.

걸어서만 갈 수 있던 산골짝 용문산기도원이 처음 대외적으로 이름을 알린 계기는 1947년 전국교역자산상구국집회를 개최(전국 교역자 803명 참석)하면서였다. 장로교신학교, 감리교신학교, 한국신학교, 서울신학교, 중앙신학교 등 당대 5대 신학교장을 강사로 초빙한 가운데 한국 초유의 산상집회가 개최되었다. 이후부터 용문산은 초교파적 신앙 부흥운동의 기지로서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6.25동란이란 민족적 시련 후엔 더욱 단단하고 뚜렸한 민족 구원의 전도운동으로 구체화되었고, 1954년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성령의 불이 붙어 올랐다.

이후 용문산기도원 내에는 교파를 초월해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의 교회가 봉헌됐고, 고등성경학교, 기드온신학교, 용문산수도원, 구국기도제단 등이 세워지며 수많은 전도자와 사역자를 배출했다. 이 모두는 나의 성장이나 교세 확장이 아닌 민족복음화를 위한 전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용문산기도원의 전도자들은 교파를 초월해 가까운 교회에 나가라고 외쳤고, 오직 민족 구원의 사명감으로 희생하고 헌신했다. 은혜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교파 교회에서 활동하면서 한국교회를 기하급수적으로 성장시키는 견인차가 되었다. 즉, 용문산운동은 기도원운동이 아니라 용문산기도원이 이끈 민족복음화 전도운동 및 성령운동의 총칭이라고 할 수 있다.

용문산운동은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① 태동기(1940~1953)는 애향숙의 시작, 민족 계몽, 기도운동의 시작이 그것이다. 이 시기 서울에서 농민성보 발간과 기독공보 발행이 이루어졌다. 애향숙 운동이 재건되었고 용문산기도원이 십자군전도대와 심령수련회를 개최하며 한국 성령운동의 본원으로서 무장돼가고 있던 시기이다.

② 성장기(1954~1970)는 나운몽 장로와 그의 제자들이 전국 부흥회를 이끌며 용문산기도원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던 시기이다. 삼겹줄 전도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고 성경학교와 신학교가 설립되었고, 개신교 수도원인 용문산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삼선봉 구국기도제단의 첫 릴레이 기도가 시작(1963.4.1)되었고, 애향숙 재단이 설립(1964년)되었으며, 교회 없는 동리에 교회 세우는 일동일교회 운동(500여 교회 설립)이 전개되었고, 전국 70여 곳에 기도원 분원이 건설됐다. 그러나 용문산운동이 어느 교파에 소속되지 않고 초교파운동으로 기세를 떨치며 전개되면서 필연적으로,

③ 갈등기(1970~2000)를 맞았다. 물론 갈등기라고 하여 갈등만 계속된 것은 아니며 운동이 지속되는 과정에 공격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신비주의 논란에 휩싸였고 일부 교단과 갈등도 불거졌다. 이를 극복하고자 국제오순절성결교단(International Pentecostal Holiness Church)과 손잡고 한국오순절성결교로 독립 교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현재는,

④ 안정기(2013~현재)에 들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재단법인 애향숙이 기독교대한감리회에 편입되면서 이전보다 제도적 안정성을 갖추게 되었다.

복음신문은 한국복음화운동이 한창이던 때인 1960년 10월 1일 창간됐다. 당연히 한국복음화 운동의 첨병 역할을 했다. 고 나운몽 목사는 복음 전파를 ‘3겹줄 전도’로 설명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절)”는 말씀을 들어 영속적인 전도 운동의 방법으로서, 부흥전도, 문서전도, 기도전도, 이 세 가지를 함께 해야 한국복음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복음신문은 문서전도가 시공을 초월해 구원의 도리를 전한다는 신념을 기반으로 전도에 제1 의 의를 두고 창간된 신문이다. 당시 발행부수 13~16만부라는 기독교계지 최초 최고의 기록을 세운 것은 ‘민족복음화’를 위한 전도가 얼마나 간절하고도 급선무인 지상과제였으며, 큰 호응 속에서 전개됐는지를 말해 준다. 결국 복음신문은 고 나운몽 목사가 민족복음화를 위해 펼친 구설, 기도, 문서 전도의 삼겹줄 전도운동 중 문서전도의 중심에 선 신문이며, 민족복음화의 첨병 역할을 한 신문으로 지금까지 66년을 이어오고 있다.

하나님의 과업으로 시작되고 수많은 결실을 맺은 용문산운동은 앞으로도 사명 감당을 위해 계승돼야 하고 시대에 맞게 발전돼야 한다. 용문산운동의 대변자로서 복음신문 역시 이를 충실히 이행해 가야한다. 복음신문과 용문산운동이 감당해 가야 할 시대적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성령운동이 회복돼야 한다. 성령운동은 막연히 성령 받으라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실천이 병행돼야 한다. 후대에 부흥성회가 축복성회와 같은 기복적 집회로 잘못 빗나간 측면과 방언, 입신 등 신비주의로 치우치는 부분을 수정하고 현세가 아닌 내세 신앙과 강건한 믿음을 회복하는 기독교의 본령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성령운동의 기준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 다음세대 복음화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현재 기독교세가 약화되면서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이 다음세대의 심각한 별리 현상이다. 한국사회의 여러 현상에서 청소년과 청년 세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해법을 제시하고 선교로 나아가는 역할을 복음신문이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디지털 선교, AI와 미디어를 활용한 복음 전파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셋째, 시대의 소명의식으로 출발했던 애향숙 정신을 현대에 되살리는 현대화 작업이 필요하다. 시대에 필요한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고, 지역 공동체 섬김, 환경 보전, 도농의 연결, 소외계층 돌봄처럼 시대 정신을 담아 현시대가 요구하는 과제를 감당해 나가야 한다.

넷째, 민족복음화는 한국이 동북아 선교와 세계 선교의 기지로 자리매김하는 틀이며, 하나님의 지상과제는 선교적 비전이다. 아직도 철의 장막에 갖힌 북한,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를 향한 선교 비전을 함께 품고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