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10월 1일자로 창간 됐던 기독교계 최초의 일간지 복음일보 통간 제1호 (복음신문 전신)
복음신문 역사1 …
70년여년 전 시작된 성령운동이 배태한 전도지 성격의 신문
성령운동 메시지 ‘한국의 소망’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은 말로 할 수 없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낙담에 빠진 한국민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새 출발의 용기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었다.
당시 전국에 휘몰아치기 시작한 성령운동의 주요 메시지는 ‘한국의 소망’과 ‘한민족 복음화’였다. 이같은 소망적 메시지는 실의에 빠져 있던 한국민들이 기독교로 귀의하는데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이 계획하고 섭리하신 대로 한국성령운동은 1970년대까지 한국교회의 세계 유례 없는 기적적 성장을 일군 1등공신이었다. 이같은 성령운동은 전쟁 후 복구 필요를 위해 어디에서 갑자기 발생하거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한국 전쟁 전부터 성령운동을 준비하고 계셨다.
한국 초유의 초교파 산상집회
성령운동의 모태가 된 용문산기도원은 1940년 일제 치하에서 극일을 위한 ‘문맹 퇴치’와 진리 수호의 ‘사랑나라 건설’을 목표로 애향숙이 개설되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애향숙은 당시 일제에 의해 기독교 반일 단체로 지목되어 창설자인 고 나운몽 목사는 만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고 나운몽 목사는 해방의 서광이 비취는 것을 본 후 다시 귀국했고 해방 후인 1947년 용문산기도원에서 장로교신학교장 박형룡 박사, 감리교신학교장 방훈 목사를 비롯 한국신학교, 서울신학교, 중앙신학교 등 당시 5대 신학교장이 강사로 나서 8백 명이 운집한 가운데 한국 초유의 초교파 산상집회가 열리게 된다.
이듬해부터는 아예 9개월간의 장기 심령 수련회가 열리는 등 용문산기도원은 본격적으로 한국성령운동의 모태로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이 강토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전쟁은 고 나운몽 목사에게 세 차례의 구사일생의 기적을 체험케 하는 등 믿음의 연단 기간이 되었다.
성령의 불길 전국에 붙기 시작
전쟁이 38선을 중심으로 소강국면에 접에들 1952년 초, 고 나운몽 목사는 향후 성령운동의 주 메시지가 된 3종의 교안을 마련한다.
1. 우리가 받아야 할 성령과 은사,
2. 우리가 가져야 할 사상과 주의,
3. 우리가 알아야 할 시대와 섭리였다. 한국성령운동이 시작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마무리된 것이다. 세 교안을 주축으로 1952년 봄, 드디어 대구 애양교회를 시발로 붙기 시작한 성령의 불길은 대구에서만 2개월 이상 10여개 교회에서 연속집회가 열렸고, 이후 부산, 서울 등 전국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실의에 빠져 갈 길 잃었던 국민들이 한국의 소망적 메시지를 받아들이면서 앞다투어 부흥전도집회에 참여하고 기독교에 귀의하여 한국교회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신앙부흥운동 못마땅해한 세력
일반 국민이 반색한 것에 반해 놀란 것은 오히려 교계였다. 순수한 신앙부흥운동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교세 확장을 우려한 교권주의가 용문산운동을 이단과 공산주의의 낙인을 찍으려 시도한 것은 이 때였다.
한창 성령의 불길이 전국에 불붙어 오를 때인 1955년 5월, 고 나운몽 목사는 예장 목사 28인의 고발로 순회전도 중에 체포되고 만다. “기독교 전도라는 미명 아래 김일성과 연결, 지하조직을 갖고 좌익운동을 하고 있는 국제공산당원”이란 터무니 없는 고발 내용의 국가보안법 위반죄였다. 누명은 27일 만에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며 벗었지만 교권주의 박해자들의 용문산 기세 확장에 제동을 걸려는 속셈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 담당 검사와 변호사들이 무고죄 역고소를 제안했지만 고 나운몽 목사는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그 시간이면 전도를 해야 하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일축한다.
이 사건 이후부터 고 나운몽 목사는 한국복음화를 위한 삼겹줄 전도운동을 전개한다.
삼겹줄 전도운동 본격 시작
고 나운몽 목사는 옥고 이후부터 “한 사람이면 패하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는다(전 4:12)”는 성경말씀을 근거로 삼겹줄 전도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끊어지지 않는 확실한 전도를 위해 구설전도, 문서전도, 기도전도를 같이 병행해야 한다는 전도 방법론이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는 담임교회와 교파적 테두리 안에 있기 때문에 전국적이고 초교파적인 성령운동을 주도하는데 한계를 안고 있다. 따라서 성령운동은 평신도가 주축된 신앙부흥운동으로서만 가능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평신도가 주도한(당시 고 나운몽 목사는 수표교 감리교회 장로의 신분이었다.) 신앙운동이자 교파성을 떠나 전도에만 초점을 맞춘 바로 이 점 때문에 성령운동을 평가절하하고 핍박하는 주요 이유가 되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 ‘한국복음화’, ‘구국기도’ 등의 새로운 이슈와 ‘성령받아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도 기존의 한국 교계의 인식에서 볼 때 생소했던 점도 초기 성령운동이 핍박받는 이유가 되었다. 따라서 삼겹줄 전도운동은 한국복음화 운동 등 새로운 이슈에 대한 교계의 이견에 대응하고 시공간적 제한을 받는 부흥집회(구설전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실효적 전도운동 방법이었다.
전도운동 일환 복음일보 창간
삼겹줄 전도운동 중 구설전도의 한계를 보완 내지 극복하기 위한 전도 방법이 바로 문서전도이다. 월간지 신앙세계 창간, 설교집 등 단행본 발간, 간증과 전도 소식을 전한 용문산통신 등 문서전도에 열정을 쏟는 중에 복음신문은 문서전도의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창간되었다. 복음신문은 특정 교단이나 교계 소식을 전하는 것이 주 목적인 다른 교계지와 달리 교파를 떠나(초교파적으로) 오직 전도에 목적을 둔 전례 없던 전도지 성격의 교계지로 탄생했다. 복음신문의 사명은 막중했다. 구설전도의 한계를 극복할 문서전도의 사명을 감당함과 동시에 한국의 시대상을 알리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한국복음화를 이끄는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했다.
따라서 복음신문은 창간 때부터 ‘성경으로 과거를 해명, 성경으로 현실을 인도, 성경으로 미래를 예언한다’는 푯대를 내걸고 지금까지 일관되게 달려오고 있다. 민족 복음화를 통한 복음나라 건설을 목적한 초교파지로서 막중한 사명을 안고 출발한 복음신문은 교계 최초의 일간지로서 ‘복음일보’란 제호로 1960년 10월 1일 창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