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기도원의 역사적 가치와 계승 …
기독교대한감리회 재단법인 애향숙 제2회 학술세미나
한국 성령운동을 대표하는 고 나운몽 목사의 영성을 4~5세기 초대교회의 영성신학과 비교한 뜻깊은 학술세미나가 개최됐다. 서울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용문산기도원의 역사적 가치와 계승’이라는 주제로 지난 11월 22일(목)에 열린 기독교대한감리회 재단법인 애향숙 용문산기도원 제2회 학술세미나에서다.
이날 남성현 교수(서울한영대학교)는 ‘초대교회 영성신학으로 살펴본 나운몽 용문산기도원의 영성’을, 정시춘 교수(정주건축 대표)는 ‘교회건축사적 관점에서 본 용문산기도원 대성전의 특징’을 각각 발표했다.
논평은 이은재 교수와 박해정 교수(이상 감신대)가 맡았다. 이에 본지는 남성현 교수와 정시춘 교수의 발제 및 이은재, 박해정 교수의 논평을 2회에 걸쳐 요약해 소개한다.
▲ 용문산기도원 제2회 학술세미나 진행모습.(사진 좌부터 사회: 최범선 목사/제1발제자 논찬: 이은재 교수/제1발제자: 남성현 교수/제2발제자 정시춘 교수/제2발제자 논찬: 박해정 교수)
‘니케아적 정통주의 영성신학으로 살펴 본 아실 나운몽의 영성’
남성현 교수는 4~5세기 삼위일체 대가들에 의해 확립된 니케아적 혹은 정통주의 영성신학과 20세기 아실 나운몽의 영성이 1600년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에서 비교 가능하고, 또 둘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는지를 영성신학의 관점에서 세밀하게 짚어나갔다.
남 교수는 니케아적 영성신학을 한 마디로 말하면 마태복음 5장 8절이라고 소개하면서 아실의 영성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일치한다고 밝힌다. 또한 남 교수는 아실의 삶과 영성운동의 발자취 속에서 초대교회의 정통주의 영성신학의 메아리를 곳곳에서 발견하고 확인한다. 수많은 현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니케아적 영성신학이 예외 없이 마태복음 5장 8절이라는 주춧돌 위에서 세워졌다. 아실의 회심 과정에서 있었던 영적 체험과 이후 삶 역시 마태복음 5장 8절에서부터 시작된다. 남 교수는 아실이 자신의 헛된 과거의 삶이 ‘밑바닥에서부터 무너지게 되었다’고 고백한 신비한 영적체험을 겪었던 회심의 과정을 나운몽의 저서를 인용해 상세히 소개하면서 나운몽이 마태복음 5장 8절을 바탕으로 한 영성체험이 그의 성령운동 저변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고, 바로 이런 점에서 초대교회의 정통주의 영성신학과 깊게 연관된다고 말한다.
남 교수는 니케아적 영성신학과 나운몽의 영성의 연결점이 되고 있는 마태복음 5장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는 구절이 나타내고 있는 두 가지 영적 삶의 원리, 즉 영혼의 ‘정화’와 하나님을 보는 것인 ‘관상’이라는 영성신학의 핵심 명제를 아실의 영성과 하나 하나 풀어서 비교 분석한다.
마태복음 5장 8절이 말하는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관상은 종말의 목적이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굳은 연합, 사랑, 향유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기독인 아실을 새로운 형상으로 다듬어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는 이 구절을 마음 깊숙한 곳에 심어 주어 ‘정화와 사랑’, 혹은 ‘정화와 연합’이란 동기가 그의 신학과 성령운동 전반에 녹아 있다.
아실은 그의 저서 ‘동방의 한나라 상’에서 제시된 ‘역사 속에 역사하는 십자가의 도’를 통해 이를 또렷이 증거한다. 아실은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호흡하고,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호흡하며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섭리 속의 십자가의 도 안에 사는 생명있는 신앙생활이다.”고 말한다. 이는 정화와 관상(사랑, 연합)이라는 영성신학의 구도와 동일하다.
즉 아실은 ‘인간 개조’인 영적인 치료를 죄에서 떠나는 길과 성령이 몸의 행실을 죽여주고 생명에서 살게 하기 위한 길 등 두 가지로 명확하게 구분했는데, 이 두 가지 길은 아실의 신학과 성령운동의 골격을 형성했고, 이로써 정화와 사랑이라는 초대교회 영성신학의 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남 교수는 말한다. 남 교수는 아실이 정화와 사랑이라는 신앙의 도를 제시하는데, 사랑의 세례인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한 연합 혹은 향유의 개념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남 교수는 먼저 정화의 단계에서 영성신학이 말하는 마귀론, 즉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악덕과 사념을 이기고 영혼이 깨끗한 상태로 정화되는 니케아적 영성신학의 정화 이론을 설명하고 아실이 말하는 눈물의 역할, 탐욕과 교만 등의 악성을 마귀의 활동과 관련시킨 점, 그리고 영혼의 정화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하다는 점이 니케아적 영성신학과 공통분모를 갖는다고 구명한다.
남 교수는 특히 아실 나운몽이 성령의 감동으로 악성이 소멸되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미움과 분노와 복수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온유와 사랑과 겸손으로 새롭게 옷입는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하면서 화와 복수심을 사랑과 온유로 승화시키는 것은 나운몽 영성의 특징이라고 강조한다.
남 교수는 한 사례를 들어 나운몽의 삶에서 나타난 정화를 설명한다. 1954년 제55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에 제출한 나운몽 조사위원회의 날조된 보고서는 이후 1956년 경북노회가 나운몽을 변태성 신앙운동자로 낙인찍고, 1976~1977년 박영관이 나운몽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기초자료가 되었다. 그런데 이 허위보고서를 제출했던 장본인인 김삼대가 23년이 지난 후 날조보고서에 대해서 사죄하러 나운몽을 직접 찾아왔다.
나운몽은 이 때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의 소행으로 보아서는 당장에 그 뺨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을 터인데도 내 마음은 오히려 반갑고 기뻤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역사임을 또 한 번 느꼈다. 성령의 불이 화끈하게 체내에서 일어나면서 내 인간성을 소멸해 주고 평안한 마음과 기쁜 마음을 준 것이다(롬 8:6)”
나운몽은 그 때 “이O현씨는 발락 노릇을 했고 당신은 발람 노릇을 했구려...그러다 보니 나는 이스라엘이 되었구려”라고 하면서 함께 한바탕 웃었다고 회고한다. 나운몽은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로 되는 사건(눅 6:28)’이 “내 마음이 너그러워서도 아니었고...오직 성령의 역사였음을 재삼 깨닫게 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나운몽은 1962년 2월 무고로 6개월이나 구속됐다가 무죄로 판결받은 사건을 겪는다. 나운몽은 당시 날로 확장되어가던 성령운동에 대한 교계의 시기와 군사정권의 부패를 지적한 것에 대한 정치권의 견제로 일어난 사건을 놓고 기도할 때 마귀는 거짓 모함이라는 불의에 대해 복수하라고 속삭였지만, 주님께서는 “나는 네가 미워하는 원수도 사랑한다”는 음성으로 그의 마음을 녹여주었다.
나운몽은 성령의 역사에 마귀도 함께 역사하는 것은 “빛 앞에 선 물체에 그림자가 생기는 이치”라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내 마음속에 주시고 굳은 마음을 제거해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겔 11:19~20)을 주셨다...나는 그 때 그들이 받을 형벌이 눈앞에 보이는 듯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며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통해 복수심은 오히려 모함과 무고를 했던 자들을 향한 눈물어린 기도로 변한 사실을 증거한다.
남 교수는 사람으로서 불가능해 보이는 원수를 향한 눈물의 기도야말로 나운몽이 정화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면서 나운몽 저술 전체를 통해서 화나 복수심은 눈물어린 성령의 감동을 통해 늘 겸손과 온유로 변한다고 말한다.
어거스트 역시 정화의 마지막 단계로서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들었고, 안토니오스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 1:20)”면서,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화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설교했듯이 분노와 복수심의 정화는 4~5세기 정통주의 기독교 영성에서 특히 강조되었다고 밝힌다.
남 교수는 영성신학의 ‘관상’의 단계에서 나운몽 영성의 ‘사랑’을 비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바실리오스가 ‘정화-사랑’의 구도를 통해 니케아적 영성신학을 펼쳐 나간 것을 분석하고 이에 준해 나운몽의 영성에서 ‘사랑(관상)의 길’을 살펴본다. 이 ‘사랑’의 길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을 사랑의 영으로 정의했듯이 ‘성령’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남 교수는 정화와 사랑이라는 영성의 길을 보다 구체적으로 성령론과 결부시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에서, 바실리오스는 ‘성령론’을 통해 성령은 인간 영혼을 하나님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며 또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자에게 다양한 은사를 부어주시는 분이라고 결론을 내린 후에 이런 은사를 통해 온 인류에게 하나님은 스스로를 드러내셨다고 주장한다.
나운몽은 “구세주가 오신다는 예언이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복음이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있던 예언이었다”며 석가모니가 말한 예언 등을 들어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만인류를 구원하러 오신다는 이스라엘의 예언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입장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남 교수는 말한다.
더 나아가 바울이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본 것처럼(갈3:24) 나운몽은 유교는 삼강오륜의 도덕률을 펼치고, 불교는 자비를 가르쳤기에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기 전까지 양심을 찾아주고 죄를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남 교수는 그리스도 강림 이전에 이방인에게도 주어진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와 나운몽이 비슷한 입장을 보이는 것은 히포의 현자와 용문산의 현자가 갖고 있는 역사신학적 관점이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남 교수는 한편으로 성령의 은사가 지닌 사랑 온유 겸손과 같은 내적인 차원이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삶에서 실질적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차원에 대해 언급한다. 후자의 사례로 남 교수는 각종 병고침의 치유사역과 마귀와 귀신을 쫓아내는 출사사역 그리고 예언사역을 들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를 통해 남 교수는 아실 나운몽의 영성이 4~5세기 성령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던 시대의 삼위일체적 정통주의 영성신학의 틀 안에 머물고 있다고 밝히면서, 아실의 영성은 니케아적 영성신학이 말하고 있는 믿음을 통한 정화의 길과 눈물과 용서, 온유와 겸손, 그리고 사랑과 기도를 통해 성령이 역사하심을 증언해 주는 이 땅의 귀중하고 아름다운 보고라고 결론짓는다.
이어 논찬에 나선 이은재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는 세 가지 점에서 제언한다.
첫째, 우리가 염려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성경적 토대와 신학적 근거를 갖지 못한 채, 영성을 부흥과 회복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기실 초대교회가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나 다음 세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화의 흐름을 피하기 위해 ‘광야’를 선택했지만, 오늘날 ‘영성’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 가능한 양 뒤범벅이 되어버린 현실은 광야를 대변할 수 없다. 오히려 정 반대이다. 여기엔 두 가지의 근원적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찾기 위해 광야가 필요하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라는 말 자체에 담겨진 연관성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