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신문 · 주간 신문“성경으로 과거를 해명한다! 성경으로 현실을 인도한다! 성경으로 미래를 예언한다!”성경으로 현실을 인도합니다
성경과 현실

성경과 현실

민족의 하나 된 외침, 3.1운동

GOSPEL TIMES
이 기사 공유

치밀한 준비 끝에 비폭력 운동으로 전개 …

기독교 정신이 배태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 3.1운동 (창 1:27, 눅 4:18, 마 5:38)

“조선독립만세”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반도 전역을 울렸던 이 함성은 우리 민족의 하나된 외침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학살·투옥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 활동을 탄압했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다.

조선태형령으로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하여 인권을 유린했다.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백성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전 민족적인 저항운동이었다.

그러나 3.1운동의 의의는 100년이 지나온 지금도 우리 민족에게까지 평가절하되고, 내용도 막연하게 3월 1일날 펼친 독립만세운동 정도로 알고 있다. 이는 3.1운동이 목적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실패한 운동으로 치부되고 있는 탓이 크다. 해방 이후 일제의 잔재를 물려받은 친일 세력의 존재가 역사 해석과 전승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3.1운동은 상당한 준비 하에 정당성을 갖추고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 민족적으로 수개월간 전개된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민족적 독립 의지를 함양하므로 그 후 무수히 많은 항일 독립운동이 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3.1운동은 우리 민족운동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각 식민지 국가에서 민족적 독립운동이 촉발된 민족 자결과 독립에 대한 세계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특히 3.1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원류가 되므로 대한민국 건국의 적통성을 잇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3.1운동은 결코 실패한 운동이 아니다. 3.1운동의 정신이 살아서 이후 독립의 당위성을 확보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전개된 항일투쟁의 기반이 되었고, 적통성, 정당성을 확보한 임시정부 수립을 통한 민족 자주 국가로서 독립을 준비하고, 해방 후 한반도의 유일 정부로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나아가 미래 통일 한국의 맥을 잇게 하는 민족사와 세계사에 길이 남을 성공적 운동이 되었다.

이에 복음신문은 지금까지 3.1운동에 대해 미쳐 몰랐거나 미진했거나 왜곡됐거나를 막론하고 3.1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보편적인 인식이 이뤄지길 바라며, 3.1운동의 진정한 의의를 고찰함과 동시에 3.1운동에 끼친 기독교의 역할을 연재기획보도한다.

3.1운동과 독립선언서

3.1운동은 단지 민족적 저항운동에서 멎어진 것이 아니었다. 3.1운동은 독립선언서와 함께 최초로 전개되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조선이 더이상 일제의 식민지가 아닌 독립국임을 선언한 독립선언서가 3.1운동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일제의 무단통치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 민족에게 독립은 먼 꿈이 아니었다. 이미 실현된 독립국가의 국민으로서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한치의 의심 없이 믿고 우리 땅에서 당당하게 “독립만세”을 외쳤다.

또한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단 하루가 아니라 이후 수개월간 전국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시작점이었다. 농민, 학생, 지식인, 상인, 노동자 할 것 없이 전 국민이 하나 되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는 결코 우발적이 아닌 독립선언서가 담은 정신적 근거와 치밀한 준비가 있어서 가능했다.

1918년 6~7월에 상하이에서 여운형·김규식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그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고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다.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김순애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했다.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 등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민찬호·정한경 등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조선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1918년 12월 조소앙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김좌진·황상규·박찬익·김교헌·안창호·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이듬해 2월 1일 이를 발표하였다. ‘무오독립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문은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최초의 ‘대한독립선언서’였다.

일본에서는 1919년 1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도쿄의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로 꾸며 모임을 갖고 최팔용·김도연·백관수·서춘 등 10인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해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송계백과 이광수를 국내와 상하이로 파견하였고, 2월 8일 유학생대회를 열어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국권강탈을 고발하고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였다.

국내에서도 1918년 말부터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윌슨의 14개조 강화원칙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독립 요구를 위한 운동을 계획하던 중 상하이, 미국, 도쿄 등지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준비를 논의하였다.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은 이승훈·양전백·길선주 등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나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했고, 송계백도 최린을 통해 도쿄 유학생들의 소식을 손병희·최남선·송진우 등에게 전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들은 1919년 2월부터 함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고, 여기에 한용운 등의 불교계 인사가 가담했다.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학생들은 2월 하순 박희도와 이갑성에게 종교계의 계획에 합류할 것을 요구받고 민족대표들의 계획에 합류한 뒤 3월 5일에 다시 서울에서 독자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 결과 2월 18일까지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 등이 작성되고, 2월 27일에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사전에 배포되었다. 학생들은 군중 동원과 시위, 독립선언서의 배포 등의 계획을 준비하였다.

이처럼 비밀리에 준비되고 전 민족이 일어난 독립운동이 세계에 없었다. 결국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이 될 수 있었다.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 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조선 강점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감정적이 아닌 이성적으로 조리있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일본과 한국이 대립이 아니라 복을 불러들이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조선독립이며, 동양이 함께 망하는 길에서 벗어나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 인류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므로 이는 한낱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고 독립선언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독립선언서는 이를 위한 공약 3장을 제시하여,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하고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말것, 최후의 한 사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할 것,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고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할 것을 천명하였다.

조선의 독립은 자주적 민족으로서 도리를 따른 정당한 것이며 누구나 떳떳하게 정당한 의사를 표현한다고 밝힌 독립선언서가 전국에 독립만세운동이 들풀처럼 번지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정당성을 잃지 않기 위해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무저항 비폭력의 독립운동의 성격을 독립선언서는 분명히 하고 있다. 이로써 3.1운동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정당성을 가진 거족적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정당성 세계에 알린 무폭력 독립운동

그러나 이같은 정당성을 가지고 거족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이었지만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는데는 난관이 많았다. 3.1운동 관련 소식이 초기에는 해외에 알려지지 못했다. 국권을 빼앗긴 이후 일본의 통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억누르고 그 의미를 축소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실상이 외부에 알려지기 어려웠다.

미국에 3.1운동이 처음 알려진 것은 3월 중순 부터였다. 그나마 처음 3.1운동을 보도한 미국 언론은 3.1운동을 폭동으로 취급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 측 주장을 받아들여 정확한 실상을 모르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얻은 일본이 세계무대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던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이 작용했다.

당시 워싱턴 타임스는 1919년 3월 15일자 2면 기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폭동’으로 깎아내렸고 한국인의 정당한 주장인 독립선언을 ‘일본 정부를 공격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일제의 주권 침탈과 탄압 등 독립을 외치게 된 근본 원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신문은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한국인들의 폭동은 멈췄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서울과 다른 지역에서 거리 시위와 소란이 그쳤다.”며, “수많은 폭도가 체포됐고 한국 일부 특히 북부 지역에서 난동으로 약간의 인명 손실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이번 사태는 일본 정부를 공격하는 내용이 포함된 문서가 유통되고 한국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비롯됐다”고 전했을 뿐이었다. 원인에 대한 진지한 고찰 없이 왜곡 전달로 일관한 것이다.

강대국의 이권 다툼이 판치던 당시 국제질서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얻었던 일본 편이었다. 더욱이 일본은 이미 1853년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1854년 미 정부와 우호조약을 체결해 무역 거래 등으로 교류해 온 터였다. 이때까지 미국 언론의 시각은 ‘우호국 편들기’에 그치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폭동’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3.1운동의 ‘비폭력 운동’은 정당한 권리 주장으로서 점차 세계에 공감대를 넓히고 설득력을 얻어갔다. 그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유일한 것이 바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외신 보도였다. 당시 일본은 3.1운동 초기에 보도 통제와 ‘프레임 조작’으로 관련 보도를 막고 왜곡하는 데 그야말로 전력투구했다.

그러나 시간의 문제일 뿐 진실을 감출 순 없었다. 미국의 대표적 신문인 워싱턴포스트(WP)는 같은 날 1면에 3.1운동의 실상을 상세히 알렸다. 두 언론의 상이한 보도는 일본의 왜곡과 기자가 타전한 진실이 혼재된 당시 상황을 증명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