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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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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국회는 좀 더 나을까?

GOSPEL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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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더 기대할 수 없는 망국병 든 이유 …

예수님 가르치신 불평등 해소, 약자 보호, 민생 위한 정치 혁신만이 해답 (마 14:21, 마 25:40, 막 3:4)

드디어 말 많던 4.10 총선이 끝났다. 22대 국회는 좀 더 나을까? 그 나물에 그 밥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나물에 그 밥일 공산이 크다. 한국 정치는 더이상 기대를 저버린 큰 병이 들었다.

조선은 당쟁으로 세월을 보내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부르고 결국 약해진 체력을 감당하지 못해 운명을 맞은 나라다. 국가의 장래가 달린 수많은 이슈들을 잠재우는 정쟁으로 세월을 보내는 한국 정치권은 조선시대보다 더한 망국병에 들었다고 보여진다.

역사는 후대에 교훈을 남긴다. 조선의 붕당은 오늘날 민주제도의 핵심인 정당제를 닮았다. 어쩌면 대단히 선진적일 수 있었던 ‘조선판 다당제’였다. 조선 중기에 접어들었을 때 훈구파를 몰아낸 사림은 그들의 이상대로 조선 사회를 만들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권력을 쥔 사림에게 찾아온 것은 ‘사색당쟁’이었다.

처음에는 동인과 서인으로, 이어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사색당쟁’의 끝은 노론의 일당 독재와 세도정치, 그리고 망국이었다.

오늘날 민주체제의 정당은 그 정강정책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고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에 진출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 상대 당의 독주를 견제하며 보다 낳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일하고 그 결과로서 다시 국민의 선택을 받으며 국가와 함께 발전한다. 이것이 오늘날 대의 민주정치의 이상이다.

정의와 민생의 이상으로 보자면 성리학과 유교철학의 기반 위에서 이상 국가를 꿈꾼 조선 시대가 더 철저한 이상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정의나 민생과는 상관없는 생산적이지 않은 소모적인 당쟁과 음모와 누명으로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잔인한 보복으로 낮밤을 지샜다. 이상주의자들의 나라가 왜 서로를 죽고 죽이는 망국의 병이 든 것일까. 겉으론 서로 더 좋은 이상과 명분을 내세우며 싸웠지만 사색당쟁의 본질은 따로 있었다.

피 터지는 당파싸움의 밑바닥에는 과전법 시행을 둘러싼 100년의 논쟁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투쟁, 그리고 숭명사대주의로 나타나는 유학이라는 교조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경제, 그리고 이념을 둘러싼 싸움, 즉 ‘조선판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당쟁의 한 예를 들어보자. 서인과 동인은 조선통신사로 일본의 정세를 똑같이 보고 왔는데 서로 다른 보고를 했다. 동인은 “침략 정황 없다”고 보고했고 서인은 “공격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라보다 자기편을 우선한 대립 때문이었다. 그러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자 왜의 공격에 준비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던 ‘서인’ 세력이 오히려 극렬하게 반대했다.

이런 누가봐도 확연한 모순적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동인’인 류성룡 일파의 세력이 커질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서인들은 선조에게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만 전력하게 하소서”라는 계본을 올렸다. 수군을 없애야 하는 첫번째 이유로 ‘풍신수길이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상황에서 공연히 수군을 확장하면 명나라의 의심을 살 수 있다’는 점을 들이댔다. 둘째로 섬나라 왜국의 군사들은 물에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조선의 수군은 불리하다는 주장이었다. 차라리 적들을 ‘육지로 유인해 철갑기병으로 쳐부수는 게 상책’이라는 거였다. 따라서 아예 수군을 없애고, 오직 육전에만 전력하자고 입을 모았다. 서인 측 주장은 조정에서 큰 분규를 일으켰다. 삼면이 바다인 조선에 수군이 필요 없다는 주장은 어불성설 그 자체였다. 조선에 ‘바다를 마주한 지역’이 얼마나 많은지 전혀 고려치 않은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 그 실체는 당파싸움일 뿐 ‘백성의 안위’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합리성을 상실한 이런 싸움이 조선 시대 내내 계속됐다. 이로 인해 실제로 서로 죽고 죽이는 숱한 사화가 나왔다. 기축사화 때는 서인 세력에 의해 1000명의 동인 세력이 죽어야 했다.

조선시대에 당쟁에서 지는 것은 곧 몰락, 유배,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죽고 죽이는 피바람을 일으켰다. 지금 한국의 정당정치가 다르지 않다. 아니, 지금 한국 정치판이 조선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22대 국회가 더 낳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유의 첫째는, 한국 정치가 진정한 진보와 보수의 정책 대결이 사라지고 권력쟁탈을 위한 기득권 세력의 패싸움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거대 정당들은 ‘부족주의 정당’이다. 편의상 ‘진보’와 ‘보수’로 나눠 부르긴 하지만, 이 딱지는 엉터리에 가깝다. 상대를 죽이는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는 구호만 난무할 뿐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정책 대안이나 여야간 협상과 정치적 결단을 통한 공통분모를 찾지 못한다.

상대를 무너뜨려야 내가 사는 승자독식 권력 쟁탈의 정치 구조하에서 상대는 공생이나 협상 파트너가 될 수 없다. 타도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한 원한과 보복, 증오가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며 극한 대결 양상을 키운다. 아무리 극한 대립을 해도 법과 규칙이란게 있는데 지금은 이것마저 무시한다. 양 진영 정치는 수단방법을 안가리고 이겨야 하는 적일 뿐이다. 중상모략, 흑색선전, 가짜 뉴스, 여론조작를 통해 상대를 악마화하는 거부의 정치를 낳았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내로남불 정치, 마타도어 정치를 통해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네거티브 정치에 혈안돼 있다.

둘째, 제3의 길이 보이지 않거나 사장되기 때문이다. 기득권적 수혜를 누리는 거대 양당은 게임의 룰을 자기가 유리하도록 정하고 막대한 조직력과 미디어, 허가받은 선거 자금을 동원해 얕은 선동정치와 포퓰리즘으로 무장하고 양자택일 외의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게 만든다. 모든 선거에서 지방자치까지 헤게모니를 갖고 양자 대결의 정치 지형을 만든다. 한 표라도 더 받은 자가 모든 것을 갖는 정치제도에서 중도파와 뜻있는 소수, 약자의 의견은 무시된다. 극단의 편 가르기만 있을 뿐이다.

‘내 편 네 편’의 편가르기는 인간의 본능과 욕구에 정치세력이 편승해 증폭시킨 결과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편 가르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생존 DNA가 들어있다. 자기편이라고 여기면 편해진다. 내 편 네 편이 힘을 쓰는 현실에서는 마녀사냥도 가능해진다. 유럽 중세 시대에 `마녀`라고 불린 사람은 국가나 교회가 볼 때는 이단자였다. 이런 끔찍한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권력자나 기득권자에게 마녀는 나를 위협하는 네 편일 뿐이다.

극한 대결 정치는 나라마저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이 나라의 언론, 학자, 시민사회까지 양분하여 대결의 싸움판이 확대되고 있다. 어느 편에도 들지 않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기 어렵다. 중도층은 양극진영의 등살에 한 진영에 편입되도록 강요받는다. 양비론은 설 자리가 없도록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다. ‘양비론 비판’이 절대적 우세를 보이는 이유는 기득권 정당과 강성 지지자들이 인터넷, 소셜미디어, 유튜브 등으로 전통적 미디어에 가하는 압박이 강해진 탓도 한몫 한다. 무엇보다 둘 중 하나에 끼지 않으면 무책임한 자거나 기회주의자로 매도 당하기 때문이다.

중도나 제3의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는다.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싶어도 양자택일만 있는 사회에서 국민은 다른 이념, 새로운 믿을 만한 신념체계를 찾지 못하고 있다. 선택지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막힌 사회임을 뜻한다. 국가와 한국 정치의 미래와 발전을 담보할 수 없다.

셋째, ‘대중의 독재’라는 더 강력한 마약에 취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극한 대결이 조선을 패망으로 몰고간 당파싸움과 닮았지만 지금이 더 강력한 힘을 갖는 것은 국민이 합세하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정치는 ‘대중의 독재’의 위험성을 극대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