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주의, 기성제도에 반발 …
하나님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 바로 인간의 존엄에 집중 (막 8:36, 사 61:1)
‘작은 저항’이 SNS라는 도구에 실려 나비효과를 일으키면서 시위에 처음 불을 댕긴 사람조차 상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나라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엘리트주의, 기성제도에 대한 반발이라는 큰 구조는 별반 차이가 없다.
르몽드는 지난 8일자 사설에서 오늘날 지구촌의 요구는 “민주주의를 다시 정복하라”는 정언이라고 평가했다. 시위는 권위주의 국가는 물론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도 벌어진다. 프랑스처럼 낡은 공화국도 노란 조끼의 도전을 받고 있다. 카이로, 홍콩, 산티아고, 칠레, 에콰도르,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각국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원인들이 시위로 이어졌다. 사설은 이를 찰랑찰랑 차있는 물병의 물을 넘치게 한 ‘한 방울의 물’로 표현했다. 르몽드는 특정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지도자 없이 벌어지는 시민의 이러한 시위들은 존엄과 평등의 요구이면서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지향한다고 해석했다. 세계화로 인한 불평등에 항의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국경 없는 상품과 서비스의 이동과 교환이라는 세계화 논리에 따라 전염성을 갖는다. 르몽드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민생의 불만이 터진 시위와 이집트·홍콩 등 정치적 압제에 저항하는 시위들의 공통점은 SNS 시대의 전염성으로 설명했다.
이미 21세기 들어 이러한 전염성 시위는 시작됐다. 2008년 월가의 살찐 고양이들의 탐욕이 부른 글로벌 금융위기 뒤 각국의 긴축재정이 초래한 시위사태도 글로벌 현상이었다. 유럽에선 ‘분노하라 시위’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선 ‘아랍의 봄’ 시위가 잇달았다. 뉴욕에선 ‘월가 점령 시위’가 추운 겨울 성난 민심을 대표했다. 아랍의 봄을 촉발시킨 주역 역시 과일행상을 하던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작은 저항’도 뭉치면 기성제도를 흔들 수 있다는 경험이 살아 있고,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 커가기 때문에 앞으로도 언제든지 시민의 저항을 촉발할 ‘한 방울의 물’이 어디에서 떨어질지 알 수 없다.
파리 정치대학 명예교수이자 국제정치학자 베르트랑 바디 교수는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는 현상들에 ‘세계화 2막 시대의 개막’이라고 명명했다. 서로 다른 나라의 사회운동이 역동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글로벌 현상이다. 이는 국가 간 경쟁 또는 협력만 보이던 국제관계 지평을 각국 사회의 수렴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으로 바꿔놓았고, 그동안 정치 대 사회가 유지했던 관계의 역전을 낳았다. 과거에 정치가 강하고 견고했고 사회는 부드럽고 물렀다면, 이제 정치는 갈수록 불확실하고 불안정해지는 반면 사회는 더 강해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바디 교수는 종래의 고전적인 사회적·경제적 요구들을 부차적인 요소로 밀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 그 자체를 요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각국의 기성정치가 문제해결을 못하거나, 자신들의 의도를 밀어붙이는데 반해 ‘민중의 귀환’은 전혀 새로운 변화를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 시민들도 언제나 거리로 나설 준비가 돼있다. 시민들이 잘못된 정치에 항의해 거리로 나서고 서명운동을 벌인다. 지난 2일엔 지난해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작업 도중 사고로 숨진 고 김용균 노동자 1주기를 맞아 아직도 개선되지 않은 위험의 외주화 금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다.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검침원들이,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우체부들이, 간호사들이, 가정관리사들이, 영양사들이, 기사들이 거리도 나서고 있다.
국가간 문제에도 나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하고, 터무니없는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요구에 항의한다. 일본에 대한 정신대 사과 촉구 집회는 27년째 이어오고 있다. 대규모 시위도 앞으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한 방울의 물’이 떨어지기 직전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경제적·사회적 질병이 더 커질 경우 시민들이 직접 나설 수 있다. 과거의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진 권력자들의 정치력은 약해지고, 정보와 네트워크로 무장한 시민들은 강해지고 있다.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시민이 사회를 바꾸는 시대, 시민에 의한 정치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둘째, 홍콩 시위는 한국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지난달 24일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범민주 진영이 압승을 거둔 후에도 홍콩 정부가 시민들이 요구한 5개 조항을 거부하자 지난 1일 홍콩에서 다시 시민 30여만 명이 참가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오는 8일 ‘세계 인권의 날’ 기념집회 때 사상 최대 규모로 열겠다고 예고했다. 놀라운 것은 홍콩은 물론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홍콩 시위의 중심에 10~20대 학생들이 있다는 점이다. 홍콩 정부는 지난 6월 초 송환법 반대 시위가 시작된 뒤 지금까지 6천 명에 가까운 시위대를 체포했으며, 이 중 40% 가량이 학생이라고 밝혔다. 시위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들은 처음부터 지난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우산혁명’의 상징인 검은색 옷을 입고 우산으로 무장한 채 “우리가 하지 않을 경우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경찰들의 강경 진압에 용감히 맞섰다. 이들은 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이다. IT기술이 급격히 발달하던 때 성장해 모바일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능숙한 것이 특징이다. 이번 홍콩 시위대도 SNS에 뉴스와 동영상을 끊임 없이 올려 전 세계에 지지를 호소했다. 특히 경제적으로도 극심한 양극화를 겪고 있는 세대로서 새로운 홍콩에 대한 열망이 남다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밀레니얼 세대가 주도하는 홍콩 시위대에 대해 “지난 1989년(톈안먼 민주화 사태 때) 학생들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정치적으로 빈틈이 없으며, 정보에 민첩하고 서로 연결돼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홍콩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감과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밀레니얼 세대의 열망이 무기력한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와 맞물려 폭발한 것으로 본다. 오랫동안 쌓여온 세대 간의 갈등이 일시에 폭발하는 것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반복돼 온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탓에 고용 감소, 일자리질 저하 등을 겪었다. 다른 세대에 비해 결혼과 출산, 내집 마련을 포기하거나 미루는 경향도 짙어지고 있다. 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교육 수준은 훨씬 높지만 사회가 갈수록 정치·경제적으로 양극화되면서 좌절감에 빠진 세대라는 점에서 홍콩의 밀레니얼 세대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크지만 경제 상황 악화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도 비슷하다.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2017년 기준으로 1천만 명이 넘는다. 이들이 약 5년 뒤엔 주력 경제활동 인구가 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한국 사회가 전혀 새로운 방향의 변화를 목도하게 될 수 있다. 2025년엔 전 세계 인구의 80% 이상이 밀레니얼 세대로 채워진다는 관측도 있다. 홍콩만이 아니라 세계는, 그리고 한국은 시민에 의해, 밀레이얼 세대에 의한 변화의 시대를 맞고 있다. 제도보다 우선하는 인간 자체에 집중하는 변화이다.
과거에 정치 경제 사회적 요구들에 인간이 희생해야 했다면, 새 국면은 인간이 먼저이고 종래의 제도들은 인간을 위한 부차적인 요소들이다. 만약 인간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정치도 경제도 헛될 뿐이라는 얘기이다.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조차 혼돈 상태로 권력과 당리를 위해 이전투구하는 한국 정치권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민생은 간곳없는 우리 정치권의 행태는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시민들은 정치에 기대지 않고 바로 ‘내가 역사의 주인’임을 인식하고 있다. 압제나 혹세무민의 정치 행태는 더 이상 지금의 시민에게 통하지 않는다. 성장 일변도의 경제적 ‘부의 축적’보다 삶의 ‘힐링’이 중시된다. 그들이 인간 중심의 변화를 이끄는 시대이다.
하나님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 바로 인간의 존엄에 집중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그 존엄이 희생당해선 안 되기 때문에 인권이 중시되고 압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첫 광야 40일 시험에서 물질과 권력과 영광을 모두 거부하신 것으로 생애와 가르침의 방향을 삼으셨다. 특히 “권력자들이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세도를 부린다(마 20:25)”고 하시며 압제적인 권력을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 이것이 이루어진 사회는 권력이나 권위, 계급이 아닌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존엄성을 갖춘 절대적 가치로서 존중받는 사회이다. 가난한 자, 주린자, 마음에 상처 입은자를 고치며 압제나 명분이 아닌 인간 자체, 민생에 집중하는 사회이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눅 4:18,19)” 권력자가 대신할 수 없었던 인간의 가치와 인간다운 삶이 우선시되는 사회가 열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