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신문 · 주간 신문“성경으로 과거를 해명한다! 성경으로 현실을 인도한다! 성경으로 미래를 예언한다!”성경으로 현실을 인도합니다
성경과 현실

성경과 현실

“구원에 개인과 국가 분리할 수 없어”

“구원에 개인과 국가 분리할 수 없어” 관련 기존 복음신문 사진
기존 복음신문 「“구원에 개인과 국가 분리할 수 없어”」 기사 사진 · 사진 복음신문 제공 · 복음신문 보유 원본
이 기사 공유

▲현재의 구국제단 모습.

▲현재의 구국제단 모습.1940년부터 구국기도를 시작하던 중 1963년 4월 30일 기도하던 삼성봉에 돌단을 쌓고 만든 구국제단.

‘용문산기도원 제4회 학술세미나’ 요약 제3회 …

김명구 박사, “나운몽의 구령과 구국의 합치 구조, 민족복음화운동의 정체성 돼”

5. 나운몽의 국가 구원관 - 구령과 구국의 합치 의식

5.1 구국제단

나운몽의 국가구원관은 구국제단으로 구현되었다. 1960년대 대한민국이 혼란기에 있을 때 시작된 구국기도가 금년으로 58년을 맞이한다. 나운몽이 “개인 부귀영화를 구하는 것은 썩을 것을 구하는 사상이다.”라고 한 점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잘 믿어야 한다는 순복음교회와 차이점이다. 나운몽이 주도하는 성령운동은 한 영혼의 구원에서 그치지 않고 나라를 살리는 길로 연결되었다. 곧 구국과 구령의 구분이 없이 합치된 것이다. 그것은 그의 민족복음화운동의 정체성이 되었고 그 의식에는 뚜렸한 국가구원관이 들어있다. 그리고 복음이 한국을 구원해 낼 수 있다는 신념이 들어있었다.

한국교회 역사에서 두가지 방식의 국가구원관이 있다. 먼저, 국가와 민족의 당면과제의 해결을 국가구원으로 인식했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다. 사회개혁정 성향을 우선한 반면 죄에 대한 심각성과 속죄의 은총이라는 개념이 크게 강조되지 않았다. 영적 영역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건설 등 국가적 과제에 우선하는 방식이었다.

이들 중에는 정치에 직접 개입하려는 목회자들이 있었다. 한경직이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신석구 등이 기독교자유당을 창당한 것과 같다. 사회적 역할이 강조되어 민중신학, 통일신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 개인구원 개념은 없었다.

반면, 비정치화의 전통을 강조하던 유형의 교회와 교인들은 구령의 영적 영역의 추구, 그 자체가 국가구원이라는 의식이었다. 한국 민족이 복음화되면, 곧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되면 그것이 한국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도식이었다. 해방 후 김치선의 ‘300만 구령운동’ 같은 것이다. 나운몽도 후자에 속했다.

나운몽의 국가구원관에서 구령은 최고의 지향점이었다. 복음이 민족을 구원으로 이끄는 유일한 통로였다. 하나님께 구국기도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도 역사 주관자이신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신앙고백이었다. 구원의 영역에 개인과 국가의 분리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5.2 반공운동

나운몽의 국가구원관은 반공운동과도 연결된다. 기독교는 애초부터 유물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특히 한국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당했던 경험으로 반공의식은 신념이 되었다. 나운몽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성경의 “북방왕, 좌향군, 붉은 군대 등등의 용어가 그대로 이미 현실에서 즉응되었다”며 공산주의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나운몽에게 공산주의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신”이었고 ‘멸공통일’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6. 이단논쟁

한편, 나운몽에 대한 이단논쟁은 그가 용문산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5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용문산집회에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자 기성교회는 위협을 느꼈으며 그의 저돌적이고 적극적 활동과 교회 비판의 성향이 기성교회와의 마찰을 빚었다. 더욱이 그가 감리교 장로이면서 장로교 지역인 대구 경북에서 활동한 것은 그의 이단성 시비를 촉진시켰다. 1954년 9월 제55회 경북노회는 김삼대 등 조사위원의 보고를 받고 나운몽의 집회 참여하는 것을 금했다. 이를 근거로 1955년 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는 나운몽의 신학이 장로교 신경에 맞지 않는다며 이단으로 규정했고, 그 다음해의 제41회 총회는 나운몽을 ‘변태성 신앙 운동자’로 비판했다. 보고서의 내용은 나운몽의 지금 부인은 둘째 부인이라는 사실이 동향인의 증언으로 확인되었으므로 장로교 강단에 세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단 논쟁은 1970년대 장로교회 박영관이 신학지남에 용문산운동 비판이라는 논문을 기재하면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한국기독공보는 1976년 11월 6일부터 여섯차례에 걸쳐 ‘용문산기도원 비판’이란 글을 실었다. 한국 대부분의 교단들이 나운몽을 거세게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이 용문산으로 가는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용문산기도원의 영향력을 쉽게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교회가 나운몽을 격렬히 공격할 때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의 김찬국이 이단 여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용문산기도원을 방문했다. 그는 나운몽의 용문산기도원이 사회개혁에 관심이 없는 것에 아쉬움을 표했지만 개인구원의 영역과 구국의 문제에 적극적인 것에는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때 김찬국은 나운몽의 신학이 구령의 문제와 구국의 문제를 합치하는 구조를 가졌다고 분석했다. 기독교 역사 속의 수도원 운동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김찬국은 용문산기도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번 나운몽 장로의 용문산기도원운동과 그의 신앙이론에서 이단이라고 할 만한 큰 교리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기도원운동이 사이비 신앙 집단도 아님을 발견하였다. 소위 사이비 종교집단이라고 해서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지나친 신비주의에 빠져 남녀의 성관계에 문란을 가져온다던가 병을 치료한다고 해서 안수로나 기타 방법으로 병자를 죽이게 되는 실수를 범한다던가 하는 미신적 종교의 말썽을 일으킨 일이 용문산 집단에는 없기 때문이다.” 김찬국은 다만 나운몽의 한국인에 대한 선민의식, 전통적인 기독교 해석에 동양적 사고를 가미한 ‘종합주의적 신앙고백’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한국 신학계 내부에서 1962년 이후 유동식을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신학의 토착화’를 주장하고 있었다. 연세대 김정준은 이들을 지지하며 ‘번역의 신학’을 극복하고 한국의 신학을 수립해야 한다고 외쳤다. 토착화의 문제를 “한국교회의 자주성과 자의식의 문제”와 민족적 자존심의 영역으로 본 것이다.

나운몽의 신학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다만 적극적으로 기성교회와 대화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용문산기도원 운동이 정상적인 전도운동이 되도록 협력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에큐메니칼 신학에서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믿는다면 신학은 달라도 함께 선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칼케톤 신조와 니케아 신조 즉,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고백하는 전통, 그것으로 최소화하여 기독교가 연합될 수 있다는 신념이다. 나운몽의 신학에서 그리스도는 “성서적 계시의 핵심이요, 성서 해석의 단서”였다. 구체적 실행의 근본적 출발도 언제나 교회였고 성서였다. 그의 신학에서는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이 강하게 주장된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폄훼될 수 없다.

그가 이단시 된 이유는 한국교회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약했던 점, 용어가 서구신학을 거친 것이 아니고 한국적이었다는 점, 즉 소통의 문제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