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을 던진 격동의 세기 마감돼…
김 前 대통령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이 끝났다. 그의 삶은 치열했다. 55차례의 가택연금, 5차례의 죽을 고비, 2차례의 망명, 3차례 6년여의 옥고와 사형선고까지 극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영광도 컸다. 제15대 대통령 당선, 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와 정권재창출,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수차례의 국제 인권상 수상, 동양의 만델라로 불리우며 노벨평화상 수상 등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앞에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영욕의 극과 극을 달린 그의 인생은 신념을 굽히지 않고 역사앞에 온 몸을 던져 산 증표였다.
대한민국은 건국 초부터 좌우 이념 문제를 숙명처럼 안고 탄생했다. 냉전 시대의 세계 양대 산맥이던 미ㆍ소가 한반도를 양분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건국했고,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6.25전쟁의 비극을 맛봐야 했고, 오늘날까지 세계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의 고통과 위협이 상존한 현실속에서 좌우 이념은 한국과 한국민을 지배하는 최대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한가운데에 대표적 희생양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었다.
그를 평생 옥죄인 굴레는 ‘빨갱이’라는 낙인이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 맞서 신민당 후보로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을 때까지도 그의 인기는 전국적이었다. 대구 유세에 20만, 부산유세에 50만명이 운집했다. 노골적인 관건선거였음에도 표차는 불과 94만표에 불과했다. 혼쭐이 난 박 정권은 최대 위협 인물이 된 그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본격화했다. ‘빨갱이’라는 오명이 본격화된 한편 사고사를 위장한 살해와 납치 살해 기도가 이어졌다.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아예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 ‘빨갱이’로 몰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그 이후에도 대선때마다 정권과 정적으로부터 북한과 연계된 ‘빨갱이’라는 누명을 써야 했다.
그가 처음 남북문제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정국 때 몽양 여운형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하면서였다. 이후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오히려 환멸을 느껴 곧바로 탈퇴한 그였다. 그는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에도 오히려 우익반동이라는 이유로 북한군에게 잡혀 투옥됐다. 그는 총살형으로 처형 직전, 처형장으로 사람을 실어 나르던 차가 고장이 나면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빨갱이’라면 공산주의자거나 체제전복 세력이어야 하지만 사상적으로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고 대한민국 헌법수호에 투철했다.
경제정책에서도 그는 오히려 보수주의의 편에 있었다. 그는 철저한 자유시장경제 신봉자였다. 적대적 인수ㆍ합병까지 허용하는 금융ㆍ투자시장 개방에 나섰고 공기업 민영화로 대표되는 공공부문 개혁, 경영상 이유의 해고를 허용하는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등 시장경제 흐름에 충실한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이해 집권 이후 진보세력으로부터 ‘신자유주의자’로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오히려 그의 경제정책은 오늘날 보수주의 정권인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맞닿아 있다. 그의 특이점은 ‘따뜻한 시장경제주의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건국이래 최초로 우리나라에 기초생활보장제 등 사회안전망을 구축했다. 그는 약자와 서민이 소외받지 않는 시장경제, 모두가 함께 가꾸는 민주주의 세상을 추구했다.
그가 인생을 바친 또 한 과제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이었다. 그는 1971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부터 미·일·소·중 4대국에 의한 한반도 평화보장론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통일정책으로 ‘남북연합→연방제→통일국가’를 골자로 하는 ‘3단계 통일론’을 주장했다. 그는 남북통일을 실현시킬 현실적인 방법을 찾는데 골몰했던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나 시대는 통일담론마저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정권을 잡은 이후 평소의 신념을 햇볕정책으로 펼쳐나갔다. 그러나 햇볕정책을 통해 북에 전달된 각종 현금 지원이 북의 핵 개발자금으로 이용됐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햇볕정책은 추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분단이 빚은 우리민족의 한계점이었다. 민족통일에 대한 한결같은 열망은 다시 그를 ‘용공’,’친북좌파’ 논란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퇴임후에도 남북화해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불과 3개월전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중국에 건너갔다. 북핵 해결을 위해 중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와의 면담 및 서신 교환을 통해 미국의 대북정책 방향도 적극 개진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서두르지 않으면 한강 이북을 중국에 내줄수 있음을 걱정했다.
그가 온갖 탄압과 누명에도 신념이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길을 걸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은 화해와 용서, 그리고 신앙심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 마자, 그는 자신에게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렸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을 특별사면했다. 그는 “용서와 사랑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새로운 민주역사를 선도하기 위해”라며 용서와 화해의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믿음과 성경말씀대로 산 신앙인이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협정을 맺으려 할때 야당이 일제히 반대했지만 그가 유일하게 찬성하고 나섰다. “원수졌던 사람들과 좋게 지내는 것이 화해 협력이지, 좋은 사람과 좋게 지내는 것이 화해협력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눅 6:32) 그는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북한을 믿어서가 아니라 한결같이 노력하므로 서로 신뢰가 생기면 앞날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자신을 죽이려던 정적은 물론 갈등관계의 이웃나라, 서로 주적으로 삼고 있던 동족 등 모두와 진정으로 손을 맞잡을 수 있게 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그것이 진정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임을 그는 믿었다. 김 전 대통령은 마지막 가는 길에도 국민간, 남북간, 여야간 화해의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이제 우리를 갈등과 대립으로 몰아넣은 모든 편견과 오해를 풀고 화해의 시대를 열어야 할 때다. 오늘날에 비추어보면 김 전 대통령의 통일사상은 전혀 급진적이지 않다. 그의 경제 정책은 오늘날엔 오히려 너무 보수적인 것이 됐다. 미국의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는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 김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 지키려 했던 민주화된 조국의 땅위에 서있다는 사실이다.
민주화시대는 이제 마감됐다. 민주화를 위해 함께 땀흘렸던 오늘날의 진보와 보수는 더이상 적대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가 돼야 한다. 이제 그가 평생 살신성인으로 지키려 했던 민주, 인권, 평화, 용서, 화해의 정신은 이 땅에 살아 새 시대를 여는 발판이 돼야 한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21) 이럴때 우리 앞에는 함께 열어가야 할 평화통일의 새시대, 선진화의 새시대가 열릴 것이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사 4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