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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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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영성의 전통 안에 있다”

GOSPEL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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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6일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에서 열렸던 용문산기도원 제4차 학술세미나, 사회자 최범선 목사(용두동교회)가 발제자와 논평자들을 소개하고 있다.(사진 좌부터 논평 김정회 박사/서울장신대 외래교수, 제1발제 김명구 박사/연세대 교수, 제2발제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명예교수, 논평 박종현 박사/한국문화신학회 학회장)

용문산기도원 제4회 학술세미나 …

김명구 박사, ‘아실 나운몽 신앙유형의 한국교회사적 위치’ 강연

고 나운몽 목사의 신앙운동의 성격을 규명하는 학술세미나가 지난 6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의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에서 개최되었다. 용문산기도원 제4회 학술세미나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 제1 발제자로 김명구 박사(전 연세대 교수, 현 월남시민문화연구소 소장)가 ‘아실 나운몽 신앙유형의 한국교회사적 위치’를, 제2 발제자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가 ‘아실 나운몽의 초기 생애에 대한 연구’에 대해 강의했다. 제1발제자에 대한 논평은 김정회 박사(서울장신대 외래교수)가, 제2발제자에 대한 논평은 박종현 박사(한국문화신학회 학회장)가 각각 맡았다. 이에 본지는 용문산기도원 제4회 학술세미나를 요약하여 연재 소개한다.

김명구 박사 ‘아실 나운몽 신앙유형의 한국교회사적 위치’

김명구 박사는 논문을 통해 나운몽에서 출발한 신학이 한국 기독교 복음주의 영성의 전통 안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당시 한국기독교가 추구하던 신앙 사조의 각 사례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개인구원과 국가구원 의식을 바탕으로 한 본 논고를 통해 김명구 박사는 “나운몽은 구령과 구국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고 기독교인의 사명은 개인 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나라를 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밝힌다. 그런데 역사의 주재자에게 구령의 영역과 국가 구원을 간구하는 그의 행위는 한국 복음주의계의 일반과 다르지 않았다고 김 박사는 지적한다.

또한 해방 후 나운몽이 본격적인 신앙운동에 뛰어든 계기에 대해 소개한다. 김명구 박사는 나운몽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겪은 갈등이 하나님 나라 건설 의식으로 발현되었다고 분석한다. 이상주의자로서 나운몽이 봤을 때 기독교가 하나가 돼야 하는데 신사참배와 친일로 갈라지고 매도하는 체제에서 견딜 수가 없었고 교회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내부 갈등을 겪는 모습에 환멸을 느끼게 되므로써, 이같은 내적 갈등이 당시 나운몽이 매진하던 임정 요인들과 교류와 농민성보 발행 등 사회운동을 겸한 문서전도운동을 접고 1947년 용문산으로 재입산해 복음의 목표인 사랑나라 건설을 위한 애향숙 재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당시 나운몽이 농민운동에 머무르지도 않고 좌익으로 가지도 않은 것은 하나님이 목표이자 유일한 방향으로 정립돼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이 오직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이 애향숙 재건과 성령운동의 시작이라는 신앙운동 방식의 전환을 이루게 했다고 보았다. 이로써 한국교회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성령운동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나운몽은 한국 성령운동의 중요한 중심 축이었다.

김명구 박사는 “나운몽은 기독교의 복음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에 확신을 심어준 것에 그치지 않고 구원의 사명을 땅과 나라로 확장시켰다.”면서 “구령과 구국의 두 축을 연결시켰고, 성령운동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실행하려 했다”고 발혔다.

김명구 박사는 결어에서 나운몽이 활동할 때 “경쟁과 승부에서 패배한 ‘약한 자’들이 넘쳐났던 시대이고 ‘상한 영’이라는 고백이 강했던 시대이다. 나운몽은 시대를 극복했고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했다. 성서의 진리를 향한 고뇌 의식과 십자가 신학, 그리고 국가 구원의 의식을 통해 기독교인들의 사명을 강조했고, 이를 통해 시대를 이기게 한 것이다.”라고 맺는다.

‘아실 나운몽 신앙유형의 한국교회사적 위치’ -개인구원과 국가구원 의식을 바탕으로- 요약

1. 서언: 한국의 기도원은 고베성서학원 출신의 박경룡에 의해 1940년경에 시작된 대한수도원과 감리교 장로 나운몽이 1940년부터 시작한 애향숙, 곧 용문산기도원이 그 시작이다.

특별히 나운몽의 기도원 운동은 교인들에게 강력한 성령체험을 제공했고 신앙의 확증을 갖게 했다. 심령 부흥을 위해 나운몽은 전국적 규모인 전국 기독교 연합 수련회를 열었고 전국을 순회하는 전국 순회 전도대회를 86차까지 실시했다.

1956년 용문산에서 개최한 교역자 수련회는 69년 10월까지 92기를 가졌다. 61년 10월 전국교역자 구국 산상기도회에는 각 교단의 803명의 교역자들이 모였다. 부흥회의 성격이 구령에서 그치지 않고 구국기도회로 연결된 것이고, 그가 주도한 성령운동은 구령과 구국 의식이 합치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이 소고는 나운몽의 신앙관이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해의 부족에 따라 때로 일각에서 이단으로 취급되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신학이나 신앙 유형이 한국교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내부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2. 나운몽 출발의 신학 - 한국 기독교 복음주의 영성의 전통

1942년 나운몽은 영음을 들었고, 이후 기독교에 입교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장로교의 김인서, 감리교회의 이필주 등 영음을 들었던 인물들이 적지 않다. 내면적이고 주관적 영성에 따른 성령운동이 내재되고 확장되어 있었고 구령과 구국의 합치 의식을 갖고 있었던 인물들도 적지 않다.

나운몽의 초기 신앙 유형은 영적 각성과 성서적 실천을 중시했던 영미 복음주의이다. 기독교 복음이 영혼을 구해내고 삶의 자리를 변화시키기를 바랐던 신학이다. 그의 신앙이나 그 형태가 한국교회 일반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출이 세례를 주었고 송창근이 일제에 체포된 그의 신원을 보증했다.

한국교회에 전파된 신학은 영미에서 부흥했던 복음주의이다. 나운몽의 신학도 내면의 신앙과 성경에 입각한 역사적 실천이 합치되었던 영미 복음주의 신학의 전통, 곧 한국교회 일반 신학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내적으로 회심해 새로 태어나는 체험을 했고, 남이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성경 공부와 기도 생활을 유지했다. 그리고 성서의 교훈에 따라 세상을 향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했다. 복음주의 신학이 말하는, 명목적 기독교인이 아닌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인정되는 행위인 것이다. 복음주의는 거듭난 존재를 강조했고 동시에 새롭고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한국교회 일반은 그런 전통을 고수하려 하기 때문이다.

3. 유토피아적 하나님 나라 건설 의식의 발현 - 이상과 현실의 괴리

해방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나운몽도 그렇게 믿었다. 일제 하에서 애향숙 계몽운동으로 김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송창근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난 이후 만주로 피신했던 나운몽은 해방을 예상하고 1945년 2월 아내와 아들 통영을 데리고 도치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