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없는 첫 순례길을, 남쪽에서 다시 걷다
한국 개신교의 시작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를 떠올린다. 그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가 조선 땅을 밟았다.
그러나 복음의 길을 따라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뜻밖의 장면과 마주한다.
그들이 오기 전에 이미 조선인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도자가 아닌 그 나라 국민이 스스로 받아들인 것은 세계 기독교사에서도 보기 드문 역사다. 외국 선교사가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현지 교회를 세우는 일반적인 선교 과정과 달리, 조선에서는 한국인이 국경 밖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한글 성경을 들고 돌아와 동족에게 전했다. 그 결과 외국 선교사가 조선 땅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먼저 형성됐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사의 특수성이다.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시작된 것도 한국 지식인들에 의해 책이 먼저 들어왔다. 서울성경박물관은 한국 천주교의 초기 역사를 “Books before institutions”, 즉 제도적 교회보다 책이 먼저 들어온 역사로 설명한다. 외국인 성직자가 상주하기 전에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들어온 서학·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을 받아들이고 평신도 공동체를 형성했다.
개신교도 같았다. 상주 선교사보다 한글 성경과 한국인 전도자가 먼저 들어왔다.
그들은 만주에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자신들의 말로 성경을 옮기는 일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품고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돌아와 다른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결과다.
외국 선교사가 조선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에 황해도 한 마을에 한국인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교회를 세웠다.
그래서 복음신문의「복음의 길을 따라가다」의 한국교회 역사길 순례의 첫걸음을 제물포가 아니라 이들에게서 시작한다.
지금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압록강 너머 북한 땅 황해도 장연.
한국 개신교의 첫 순례길은 역설적이게도 지금 우리가 온전히 걸을 수 없는 길이다.
여기서 「복음의 길을 따라가다」는 난감한 문제와 마주한다.
우리가 가려는 한국 개신교의 첫 길을 정작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출발점은 중국 만주였다. 심양에서 한글성경이 만들어졌다.
1848년 7월 26일 평안북도 의주 출생으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서상륜은 한학과 한글에 대한 지식이 뛰어났다. 13세 때 부모를 잃고 의주와 만주를 오가는 인삼 장사를 하던 서상륜은 만주에서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메던 것이 계기가 되어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선교사 존 로스·존 매킨타이어를 만나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성서 번역과 출간에 큰 역할을 했다.
로스는 서상륜에 대해 궁중 언어를 완벽하게 말하고 쓴다고 평가했다. 성서 번역엔 이성하 · 이응찬 · 백홍준 등 한국인들이 같이 참여했다. 한국어 성경은 한국인 번역자들이 중국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를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그리스어 · 영어 개역과 비교하여 수정하는 방식으로 번역되었다.
드디어, 1882년 가을 최초의 한글 성경인『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가 간행됐다.

서상륜은 순교를 각오하고 조선에서 전도하기를 자청해 이듬해인 1883년 성경을 품고 압록강을 넘어 고향 의주로 향했다. 그러나 기독교를 전도한다는 소문이 의주에서도 관가에 알려지자 동생 서경조와 함께 친척이 살던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사람들이 ‘솔내’ 또는 ‘소래’라 부르던 마을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전도 활동을 하면서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로 발전시켰다.
심양 → 압록강 → 의주 → 황해도 장연 소래.
한국 복음 순례길의 첫 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지금 그 길의 대부분은 우리가 자유롭게 걸을 수 없다.
의주는 북한 땅이고 소래마을도 북한 황해도 장연 지역에 있다.
그렇다면 「복음의 길을 따라가다」의 첫 순례는 여기서 멈춰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길은 사라졌지만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은 남쪽까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갈 수 없는 북한의 길을 바라보면서, 그 길에서 시작된 신앙이 남쪽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황해도 소래교회가 용인에 있다
첫 번째로 찾아가야 할 곳은 경기도 용인이다.
총신대학교 양지캠퍼스에 들어서면 뜻밖의 옛 교회 한 채를 만난다.
기와지붕을 얹은 소박한 한옥 예배당.
복원된 소래교회다.
이 복원은 단순히 비슷한 한옥 교회를 하나 지어놓은 것이 아니다.
남북 분단으로 고향 교회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예장합동 황해노회가 소래교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1984년 복원사업을 시작했고, 약 4년의 작업 끝에 1988년 9월 30일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옛 소래교회당을 재현했다.
현재 건물은 소래교회 최초의 초가 예배처가 아니라 1895년에 세워져 증축된 기와 예배당의 모습을 복원한 것이다.
그 안에 들어서면 당시 한국인들이 어떤 공간에 모여 성경을 읽고 예배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이 예배당이 세워진 이유다.
소래교회는 선교사가 세워준 교회가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도하고, 공동체를 만들고, 자신들의 힘으로 예배당을 마련한 교회였다. 당시 교회 건축 소식을 전해들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건축자금을 지원하려고 하자 서상륜은 “우리가 우리 교회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 일은 본의에 어긋나며, 후세에 전하는데도 떳떳하지 못하다”며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소래교회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래서 분단으로 원래의 소래교회에 갈 수 없게 된 뒤에도 그 기억만큼은 남쪽에 다시 세워졌다.
북한에 있는 교회가 건물의 모습으로 남한에 건너온 셈이다.
예배당 앞에서 서상륜을 다시 만난다
복원 소래교회 주변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곳에는 서상륜을 기념하는 비가 있다.
성경 번역자이자 권서이며 소래 신앙공동체 형성의 중심인물, 우리가 따라온 바로 그 사람이다.
북한에 있는 소래를 직접 방문하지 못하더라도 복원 소래교회 → 서상륜 기념물 → 관련 역사자료를 찾아보며 적어도 남한에 남겨진 소래의 기억을 따라 걸을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후손’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 특히 흥미로운 흔적 하나를 찾았다.
서상륜·서경조 형제의 후손이 지금도 남한에서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2023년 서울노회 장로회가 복원 소래교회를 방문했을 때 새문안교회 서원석 장로가 현장에서 ‘한국 개신교 역사의 시작, 소래교회의 변천과 사회적 영향’을 주제로 강연했다.
서원석 장로는 서상륜·서경조 형제의 증손자다. 경제정의실천연합 창립자인 서경석 목사도 서상륜·서경조 형제의 증손자다.
역사의 서상륜과 오늘을 연결해 주는 사람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소래에서 시작된 길은 서울로 이어졌다
다음 순례지는 서울이다.
광화문 새문안로에 있는 새문안교회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의 주재 아래 한국인 14명이 모여 새문안교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이 14명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살펴보면 소래와 서울이 연결된다.
새문안교회가 공개하고 있는 교회사에는 당시 한국인 세례교인 14명 가운데 13명이 서상륜 또는 그와 연결된 사람의 전도로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존 로스의 기록이 소개돼 있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소래의 이야기가 북한 어느 작은 마을에서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한글성경 번역에 참여했던 서상륜이 조선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생겼고 그 사람들이 서울의 첫 장로교 조직 교회를 구성하는 핵심이 됐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의 초기 길은 이렇게 다시 그려볼 수 있다.
심양 → 의주 → 소래 → 서울 정동.
국경을 넘어온 성경이 한 사람에게 전해지고,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그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었다.
복음은 그렇게 사람을 따라 이동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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