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에 복원된 소래교회에서 서울의 새문안·승동·연동교회까지… 분단이 가로막은 한국 초기 개신교의 발자취
1880년대 만주에서 시작된 한국인들의 복음 전파는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소래를 거쳐 서울로 이어졌다.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가 중심이 된 소래의 신앙공동체는 외국 선교사들의 본격적인 입국 이전에 형성됐으며, 이곳에서 시작된 한국인들의 전도 활동은 서울의 초기 장로교회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오늘날 이 역사를 현장에서 따라가는 일은 쉽지 않다. 서상륜이 성경을 가지고 건넜던 의주와 소래교회가 자리했던 황해도 장연은 모두 북한 지역에 있다. 중국 심양의 성경 번역 현장 역시 국내 순례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렇다고 첫 복음의 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경기도 용인에는 소래교회를 복원한 예배당이 있고, 서울에는 서상륜의 전도 활동과 연결되는 교회들이 남아 있다. 초기 한글성경의 실물과 선교 기록, 후손들이 전하는 이야기도 이 역사를 복원하는 단서가 된다.
황해도 소래교회를 용인에서 만나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있는 총신대학교 양지캠퍼스에는 한옥 형태의 소래교회 복원 예배당이 자리하고 있다. 북한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있었던 소래교회를 기념하기 위해 남한에 재현한 건물이다.
소래교회는 한국인들이 주도해 형성한 초기 개신교 신앙공동체라는 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상륜은 만주에서 성경 번역과 보급에 참여한 뒤 조선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했고, 동생 서경조는 소래에서 신앙공동체가 뿌리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래교회의 설립연도에 대해서는 1883년과 1884년 등 기록상의 차이가 있으므로 최초의 예배 모임, 신앙공동체 형성, 예배당 건립 시점을 구분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용인의 복원 예배당은 당시 최초의 예배처가 그대로 이전된 건물이 아니다. 황해도에 있던 소래교회의 후대 예배당 모습을 재현한 건축물이다. 따라서 이곳의 역사적 가치는 건물 자체의 원형 보존보다는 북한에 남겨진 초기 한국교회의 공간적 기억을 남한에서 계승한다는 데 있다.
복원사업은 소래교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추진됐으며, 1988년 총신대학교 양지캠퍼스에 복원 예배당이 세워졌다. 오늘날 방문자는 이곳에서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 공간을 살펴보면서 분단 이전 황해도 지역 개신교의 역사를 되짚을 수 있다.
소래교회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곳을 거쳐 간 선교사들의 기록 때문이다. 캐나다 출신 윌리엄 존 매켄지 선교사는 1893년 조선에 들어와 소래에서 활동하다 1895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소래 체류와 활동은 한국인 신앙공동체와 외국 선교사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소래는 한국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공동체였지만, 이후 외국 선교사들과 교류하면서 한국 개신교 선교사의 한 장면을 형성했다.
새문안교회, 소래에서 서울로 이어진 인연
용인에서 확인한 소래의 흔적은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로 이어진다. 새문안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 선교사의 주재로 조직된 한국 초기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현장이다.
교회 창립 당시 모인 한국인 신자 14명 가운데 상당수가 서상륜의 전도와 연결돼 있었다는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새문안교회 교회사와 초기 선교 기록에는 창립 교인 14명 중 13명이 서상륜의 전도 활동과 관계가 있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이는 서상륜의 활동이 소래에 머무르지 않고 서울의 교회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기록을 모든 창립 교인이 소래에서 이주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소래는 초기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중요한 장소이고, 새문안은 서상륜의 전도와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이 만나는 서울의 거점이었다. 두 교회를 연결하는 것은 단순한 인구 이동보다 사람을 통한 전도와 신앙의 확산이다.
현재 새문안교회는 창립 당시의 건물이 아니라 여러 차례 이전과 건축을 거쳐 형성된 공간이다. 따라서 순례의 핵심은 오늘의 예배당을 1887년 현장과 동일시하는 데 있지 않다. 교회가 보존한 창립 기록, 초기 교인 명단, 언더우드 관련 자료 등을 통해 소래에서 서울로 이어진 인적 관계를 확인하는 데 있다.
승동과 연동, 초기 한국인 전도자의 활동 무대
새문안교회에서 종로 일대로 이동하면 승동교회와 연동교회를 만날 수 있다. 두 교회는 한국 개신교가 서울의 여러 계층과 지역으로 확장되던 시기의 역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승동교회는 1893년 곤당골에서 시작된 교회로, 서울 도심에서 장로교 전도가 확대되는 과정과 관련이 깊다. 새문안교회의 초기 기록에는 언더우드가 서상륜을 비롯한 한국인 전도자들을 서울과 경기 지역에 파송하며 전도 활동을 넓혀갔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연동교회 역시 1890년대 서울 장로교회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서상륜이 새문안교회뿐 아니라 연동교회와 승동교회 등에서도 조사로 활동했다고 기록한다. 조사란 당시 목사 안수를 받기 전 전도와 교회 사역을 담당하던 직분으로, 초기 한국교회의 현지인 지도자들이 맡았던 중요한 역할이었다.
서상륜의 활동을 이 세 교회와 함께 살펴보면 초기 한국교회의 전도 구조도 이해할 수 있다. 외국 선교사들은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 교육과 조직을 담당했으며, 한국인 조사와 권서들은 언어와 지역사회의 관계망을 활용해 복음을 전했다. 특히 서상륜처럼 성경 번역과 보급, 지역 전도에 모두 참여한 인물은 초기 개신교의 확산이 선교사만의 활동으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한글성경 원본이 증언하는 또 하나의 역사
서상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순례에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자료는 초기 한글성경이다. 만주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복음 전파는 구전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과 이를 보급한 권서들의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82년 중국 심양 문광서원에서 간행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는 초기 한글 개신교 성경 가운데 핵심적인 자료다.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 선교사, 이응찬·백홍준·서상륜 등 한국인 협력자들이 참여한 번역사업의 성과였다. 이어 1887년에는 한글 신약전서 『예수셩교젼셔』가 간행됐다.
이 자료들은 지금도 국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한성서공회 성서학도서관은 1882년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원본을 소장하고 있으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도 초기 한글성경 관련 자료가 전해진다. 다만 기관마다 소장본의 판본과 간행연도가 다를 수 있어 1882년 초판과 후대 재간본을 구분해야 한다.
성경 실물을 확인하는 일은 단순한 유물 관람 이상의 의미가 있다. 번역에 참여한 한국인들의 이름, 책의 간행 장소와 연도, 판본의 변화 등을 살펴보면 초기 한국인 신자들이 성경의 수용자에 머무르지 않고 번역과 전파 과정에도 참여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손과 교회 기록, 아직 남아 있는 증언들
서상륜과 서경조의 역사는 문헌에만 남아 있지 않다. 2023년에는 두 형제의 증손자로 소개된 새문안교회 서원석 장로가 용인 복원 소래교회에서 소래교회의 역사와 사회적 영향을 주제로 강연한 사실이 교계 언론에 보도됐다.
후손들의 증언은 초기 교회사 연구를 보완할 수 있는 자료다. 다만 구전으로 전해진 가족사는 당시의 선교보고서나 교회 회의록, 성서공회 문서와 대조해야 역사적 사실로 확정할 수 있다. 후손이 보관한 편지나 사진, 족보, 기념자료가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일도 향후 취재 과제로 남아 있다.
자료의 범위를 더 넓히면 서상륜 개인의 전도 활동을 넘어 초기 한국인 지도자들이 어떤 경로로 성장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서경조의 목회 활동과 초기 장로교 지도자 양성과정은 소래의 신앙공동체가 한국교회 조직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남한에서 걷는 첫 복음의 길
이러한 흔적을 연결하면 남한에서 답사할 수 있는 역사순례의 기본 동선이 만들어진다. 용인 총신대학교 양지캠퍼스의 복원 소래교회를 출발점으로 삼고, 서울 새문안교회와 승동교회, 연동교회를 찾아가는 방식이다. 초기 한글성경 실물과 관련 자료를 소장한 기관은 별도의 자료 탐방 일정으로 연결할 수 있다.
다만 이 동선은 서상륜이 실제로 같은 순서로 걸었던 길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북한에 있는 원래의 소래교회와 의주를 방문할 수 없는 현실에서 남한에 남아 있는 관련 장소를 역사적 주제에 따라 연결한 현대의 역사순례 코스다.
그 차이를 분명히 할 때 순례길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후대에 복원한 장소, 역사적 인물이 활동했던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 건물, 원본 사료와 후대의 기념자료를 구분하는 일 자체가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1880년대 만주에서 시작된 한글성경 번역과 조선인들의 전도 활동은 황해도 소래를 거쳐 서울의 초기 교회 형성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우리는 그 모든 장소를 자유롭게 방문할 수 없지만, 용인의 복원 예배당과 서울의 교회들, 국내에 남아 있는 성경 원본과 기록을 통해 그 역사의 상당 부분을 다시 살펴볼 수 있다.
갈 수 없는 북한의 첫 복음길을 남한에서 걷는다는 것은 사라진 길을 상상으로 채우는 일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료와 현장을 연결해 그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언젠가 의주와 소래를 직접 방문할 수 있게 된다면, 오늘 남한에서 시작한 이 순례는 비로소 원래의 현장까지 이어질 것이다.
![[1편 하] 갈 수 없는 소래의 길, 남한에서 다시 찾다](/manus-storage/newsroom/submissions/1/1793470552730-__1_bc561b6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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